둥근구름
노인은 두둥실 떠다니는 맑은 구름을 한참이나 쳐다보며 말을 잊지 않았다. 깊게 페인 눈가의 주름엔 반달모양의 흔적만이 노인의 얼굴을 수놓았고 목에 남긴 살거죽의 도랑속엔 삶의 우환이 깃들어있었다.
앞에 놓인 조금은 미지근해 진 찻잔을 두손모아 들고는 말을 이었다.
"...그때는 참 한가로운 하루의 연속이었어요. 내가 그당시만해도 꽃다운 스무살 중반이었으니까, 그럴만도 하지요. 도랑을 따라 밭을 메던 옆집 수동이네 아버지도, 누렁이 밥곪을까 노심초사하며 녹을 먹이던 수동이며, 한상 가득 차려 나와 새참을 나르시던 수동이네 어머니도, 그리고 그 해 여름 품앗이를 돕던 동네 아낙들이며 청년들까지도..."
인터뷰 내내 말을 잘 하지 못하던 노인은 그새 추억에 극장에서 자신이 만든 영화 한편을 관람하듯 시선을 잊고 창밖을 내다 보았다.
"...참 우습지요? 남의 남편을 사랑한다는것도, 다른 여자의 남편을 사랑하는게 참으로 우습지요?"
잔의 끝부분을 다 닳아 터진 엄지손가락으로 쉬이쉬이 만지고 있는 노인을 보았다. 저 손이 그땐 참으로 고왔겠구나 생각이 들 터였다.
"...총각은 좋아하는 내 친구를 차암 닮았네요."
메만지고 있던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다 놓고, 어느새 날바라보고 순박하게 웃으며 턱을 괸체 나를 올려다 보았다.
"그 사람도 나를 좋아했는지.... 미련한 사람.."
-그 좋아하셨다고 했던 어르신 이야기좀 해주세요
"아, 맞네요 맞아. 그얘기 하던 참이었지 참, 제가 정신이 없네요 하하... 우린 다 모여서 수동이네 밭뙤기를 모내기 해주고 있었어요, 동네 아낙들은 수대로 그늘진 곳에 모여서 새참을 나르는 척 헐벗은 청년들을 우러러 봤지요. 그때 나는 한의 어께가 그렇게 넓었는지 처음알았다오."
배시시 웃는 노인의 표정에서는 십 수 년전 그때의 감성으로 돌아가 그 날을 기억하듯 얼굴을 붉게 상기시켰다.
"마치 다른 곳에서 온 사람같았다오. 멀리서 보고 있으면 다른 생각을 하는 듯했다오."
노인은 주름진 손등을 메만지며 말을 이었다.
"한의 손끝에는 담뱃진이 깊게 물들어 노랗게 수놓아 져 있었다오. 우리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던 담뱃닢을 곱게 썰어다가 질좋은 담배가 나오면 손이 노랗게 물들어 가는지도 모르고 그 길로 곧장 아버지께 달려가 담뱃닢을 드리곤 했지."
차를 한모금 입에 머금더니 미간을 찌푸리며넘겼다. 조름 차가워 졌을텐데... 노인에겐 조금 뜨거웠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은 잔기침을 서너번 하더니 말을 이었다.
"흠흠.. 죄송해요, 요세 기관지가 많이 약해져서... 이제 살날도 얼마 안남았나봐요."
노인은 나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홀홀 웃으며 말했다.
"...에...그러니까 어디보자, 아마 스무살 하고도 두해가 더 지났을 거에요, 그해 여름께 소낙비가 굳게 내려 밭에서 풀뫼고있던 나에게 홀딱 젖은 새앙쥐 꼴을 선사해 주었지 뭐유, 홀홀.. 고뿔이 심하게 걸려서 코며, 목이며 어디하나 걸걸하니 성한곳이 없었지... "
노인은 툭, 시선을 떨구었다. 환기를 시키려 열어놓은 창문 틈 사이로 날아온 민들래 홀씨가 새하얀 침대 가까이 내려앉은 부분에, 그 깊게 페인 골짜기 속 묘안석은 맑게 빛나고 있었다.
"그때였을 거요, 한시진을 내달려 나에게 다가온 한은 아랫마을 고약하기로 소문난 화타양반에게 고뿔에 좋은 약재를 얻어다가 내게로 왔어요. 그리고 며칠동안이나 나를 간호해 주었다오."
다시 잔기침-
"한 이 삼일을 앓아 누웠을테지... 어느덧 식은땀도 다 흐르고, 찝찝했던 몸상태도 결국은 나아 졌어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물수건은 내 이마 위에 살짝 포개저 있고 한은 내 머릿맡에서 새근새근 잠에 들었지 뭐요."
민들래홀씨가 불어온 바람에 다시 날아간다. 노인은 다시한번 그 흔적을 쫒아 본다.
"나도 그때 모르겠다오. 왜 입을 맞추었는지, 그 도톰했던 입술에, 왜 내 입을 갖다 대고 싶었는지."
노인은 광대 두 언저리가 발그래 하며 말을 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후회한적이 한톨도 없었다오. 우리는 열렬히 사랑했고. 사람들은 열렬히 반대했어."
다시 한모금 -
"난, 남자로써의 내가 아닌, 사람으로써 내가 사랑을 느낀거라고 생각한다오."
창밖에서 불어온 바람을 통해 들어온 민들래 홀씨는, 다시 깊게 빨려들어가듯, 창밖으로 날아갔다. 문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똑똑-]
"할아버지, 주사맞으실 시간이에요."
순백색의 제복을 입은 백의의 천사가 카트를 끌고 들어왔다.
"면회객은 이제 시간이 다 끝나서요... 안정을 취해야 하거든요."
백색의 옷을 입은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아, 네 알겠습니다.
나는 내가 챙겨온 것을 손에 들고 노인의 얼굴을 보았다. 아무 말도 필요치 않았다. 우리 둘다, 표정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저 갈게요.
내가 말했다.
"내 사랑이야기가... 작가선생에게 도움이 되겠수?"
그가 말했다.
-그럼요.
"이제 갈 수 있겠구려."
깊게 패인 구덩이에선 말간 울부짖음이 솟아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