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고등학교의 입학식이 끝나고 수업을 위해 교실로 향했다. 대망의 첫 수업이 시작될 것이다. 한국사 과목의 수업으로 국사 선생님이 등장했다. 까무잡잡, 울퉁불퉁한 이목구비와 우람한 체격. 흡사 조폭을 연상케 하는 선생님이었다. 처음 만나는 친구들과 "망했다"를 속삭였다. 고등학교는 중학교와 차원이 다른 곳임을 처음 맞이하는 선생님을 통해 체감했다. 누군가를 통해 기세를 잡을 듯 본보기 대상을 찾는 것처럼 교실을 한 바퀴 돌았다. 그의 발걸음은 청소도구함 앞에 멈춰 섰다. 청소도구함 위에는 입학을 축하하는 화환이 놓여 있었다.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 것일까. 긴장감이 감도는 교실 속 그의 입에서 "꽃 향기 좋제?"라는 말이 나왔다. 그리고 긴장감은 모래 위에 지은 누각처럼 무너졌다. 나만 그럴 것이 아닌 것이 모두가 웃음이 터졌다. 조폭 같은 외형의 남자는 꽃을 좋아한다. 이어서 긴장감이 사라진 교실에는 시 한 편이 낭송되었다. 한국사수업은 시 낭송을 시작으로 수업이 이루어졌다. 문학수업보다 한국사 시간이 더 문학적이었다. 그가 읽는 것은 자신의 작품 또는 같은 문단 시인의 작품이었다. 작품의 해석은 없었다. 그저 듣기만 할 뿐이었다. 그는 작품에게 자유를 부여한 것이다. 교육과정 속에 수록된 문학작품들은 형식과 해석의 감옥에 가두어졌다. 그러기에 그는 우리에게 작품을 분석하지 말고 듣기만 하라고 말했다. 항상 기다려지는 시간이 되었다. 어느 날 무슨 일을 겪은 듯 시가 아닌 질문을 던졌다. "남자는 세 번만 울어야 하냐?". 지금껏 이런 말이 있어도 개의치 않고 살아왔다. 사회 속에 완벽하게 적용되지는 않지만 행동을 제약하는 문장들을 미끼를 던지듯 던져주었다. 같은 교실에 있던 친구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큰 울림이었다. 어릴 적 부모님의 이혼으로 외갓집에서 자란 덕에 외조부모님에 대한 사랑이 넘쳤다. 말썽을 부려 맞기도 했지만 자는 동안 약을 발라주시기도 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밥도 거르고 울었다. 훗날 어른들은 나의 울음을 울부짖음으로 기억하기도 한다. 벌써 세 번을 다 울었다. 나에게 눈물을 제약하는 문장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질문이 없었다면 무의식적으로 나를 제약하는 문장들에 구속되었을 것이다.자신의 감정에 솔직해라. 그가 질문 뒤에 던진 한마디는 당연하다는 듯 인식되어온 것들에 대한 반항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와의 인연은 인생이라는 긴 여정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말해주었다. 이후 당연하다는 것들에 반발심을 가지기도 하면서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경향이 생겼다.
글쓰기의 계기
언젠가 그는 나에게 자신의 습작 노트를 보여주었다. 글이라는 것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기록과 퇴고가 있어야 하는지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2학년이 되면서 그와의 수업은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고3이 되기 전 스펙을 쌓아야 한다는 생각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주관하던 '우리 역사 바로 알기 대회'에 참가하기로 했다. 대회는 문헌연구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10여 장의 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해야 했다. 이 과정이 나에게 "너는 글쓰기를 참 좋아하는구나"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나의 서론(문제제기)과 본론 그리고 결론은 나만의 필체를 알게 해 주었다. 나의 필체는 자신감 있으며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지금의 글들도 힘이 잔뜩 들어간 글이다. 나에게만큼은 큰 울림을 기록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퇴고의 과정을 즐기기까지 했다. 쉬는 시간이면 인쇄된 종이에 연필로 퇴고를 거치고 더 좋은 내용을 첨가하기도 했다. 이를 위해 많은 책을 읽어야 했고 반복해서 읽는 글이지만 미묘한 변화에도 기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숨길수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숨기지 않았던 것이다. 대학에 입학한 후 책을 멀리 했던 이유일까. 펜을 잡을 수 없었다. 최근 들어 앞날에 대한 걱정과 함께 변화가 필요함을 느끼며 세상의 지식들을 흡수하고 나만의 길을 찾기 위해 많은 양의 독서가 시작되었다. 여행에 대한 그리움도 글쓰기에 한몫을 했다. 2017년도에 떠났던 인도 배낭여행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이 생겼던 것이다. 4년이나 지나 기록으로 옮긴 것이지만 감정은 생생했다. 하지만 더 늦었다면 생생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글로 남겼을 것이다. 여행기로 시작한 글쓰기는 머릿속에만 존재했던 생각들을 정리한 글이 되었다. 존경하고 어쩌면 흠모하는 나의 스승에 대해 한 편의 글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이다.<오 캡틴. 마이 캡틴>의 제목의 글을 쓰는 이유인 것이다. 훗날 작가 대 작가로 만나 "당신의 시 낭송과 부당한 사실에 대한 저항의 모습들이 나를 이렇게 변화시켰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감사하다고.
작가 대 작가로 만나요.
10년이 지났지만 나의 캡틴은 잊히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이전부터 알았던 지인들도 오랜 기간 왕래가 없이 갑작스레 만나면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7년이 지났음에도 그의 행동과 말들은 정확히 기억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는 나의 무의식이 아닌 의식 속에 기초를 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글과 함께하고 당연하다고 여기던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삶의 시작이 그가 퍼뜨리는 선한 영향력 덕분이지 않을까. 이외에도 수시로 그의 안부를 찾고자 모교의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고 시인으로서 그를 검색해본다. 또는 책장에 꽂힌 그의 시집을 편 뒤 그가 소리 내어 읽었던 시 들을 다시 한번 읽어보는 것도 한몫을 했다. 애석하게도 그의 안부는 더 이상 모교 홈페이지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그는 기간제 교사로서 한 곳에 둥지를 틀지 못한 것이다. 감정에 솔직했던 그는 어떠했을까. 그의 시는 익숙하지만 새롭다. 자신의 삶을 녹여낸 시는 익숙하지만 슬프다. 이제는 더 이상 그를 찾을 수 없다. 언젠가 데뷔작을 들고 그를 찾아 반갑게 인사하며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글을 쓰는 재미와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어 고맙다고 말이다.
27년 짧으면 짧은 인생이 그로 인해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현실은 매출 없는 창업가이자 월 100만 원 내외를 벌고 있는 파트타이머이지만 현재의 사고와 삶에 행복함을 느낀다. 그와 비슷한 이들을 만나 많은 고민을 나누고 가시적으로 경제적 자유를 목표로 하지만 우리의 진정한 목표는 경제적 자유를 뛰어넘은 행복한 삶이다. 그의 영향이 없었다면 지금의 인연과도 흘러가는 시간 속의 바람처럼 스쳐가는 인연이었을 것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님의 뒷모습에 "오 캡틴. 나의 캡틴!."을 외쳤던 학생들처럼 그에게 행복한 삶이 함께 하기를 바라며 당신의 크기는 너무 컸기에 어렸던 우리는 당신을 이해하지 못했고 당신의 옳음에 늦었지만 이제야 감사한 마음을 글로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