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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요일 다섯시 Apr 05. 2018

세월이 약이라는 말

충분히 슬퍼하고 아파할 것


개는 남자만 보면 바들바들 떨었다.



상대가 몸집이 크거나 안경을 쓴 사람이면 더 그랬다. 산책을 나섰다가 그런 사람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개는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꼬리를 잔뜩 말아 제 가랑이 사이에 숨기는 것도 모자라 뒷걸음질 치며 내 뒤에 몸을 숨겼다. 땅바닥에 시선을 박고서 떨고 있는 개를 보고 있자니 화가 났다. 무엇이 너를 이렇게 만든 걸까. 저 앞에서 걸어오는 덩치 크고 안경을 쓴 남자가 괜스레 밉게 보였다. 남자가 가까워질수록 개는 몸을 작게, 더 작게 웅크렸다. 마치 먼지라도 되려는 듯.    


개는 <유기견bc-fsdf>쯤 되는 멋대가리 없는 이름표를 떼어버리고 예쁜 이름을 얻었다. 죽을 날만 기다리다가, 이제는 모래알 같이 무수한 살 날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개에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개는 이름도, 죽을 날도, 살 날도 헤아릴 수 없었다. 개는 그저 툭하면 떨었고, 툭하면 내 등 뒤에 숨었다. 집에서 사료를 먹다가도 주위를 살폈고, 푹신한 이불에서 자면서도 깜짝깜짝 놀랬다. 깊은 밤이면 이불 속에서 우는 소리를 냈다. 숨을 버겁게 쉴 때도 있었다. 개에게는 내가 미처 끊어내지 못한 목줄이 걸려있었다. 그것은 두려움이자 깊은 상처였다. 그것들은 개의 등이며 배에 빈대처럼 눌어붙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보호소에 전화를 걸었다. 혹시나 개가 어떤 학대를 받았는지, 어떤 환경에서 버려졌는지 알 수 있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내가 알아낸 것이라고는, 개가 서울 관악구 어딘가에서 구조됐다는 사실뿐이었다. 나의 미움이 관악구에 사는 어떤 덩치 크고 안경 쓴 남자에게 향했다. 내 꼭 관악구를 지나가다가 그런 남자를 마주치면 있는 힘껏 가자미 눈으로 째려봐 주리라.    


사람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 항변을 한다. 탄원서를 쓴다. 손해배상 청구를 한다. 하지만 개들은 그저 몸을 숨기거나 바짝 엎드릴 뿐이다. 개는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천국행과 지옥행이 갈린다. 운 좋게 천국행 기차에 탑승했다가도 방심해선 안 된다. 병들거나 나이가 들면 지옥행 기차로 환승 당하기 쉽다. 그러나 개들은 지옥 속에서도 자신을 그 기차에 태운 사람을 향해 날선 마음을 먹지 않는다. 개들은 애초에 그렇게 생겨먹었다. 개의 눈을 들여다 보면 알 수 있다. 개의 눈에는 미움이 없다.


내가 개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말을 걸어주고, 안아주고, 밥을 담뿍 주고, 산책을 시켜주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면, 언젠가 너는 보통의 개가 되어 있지 않을까. 사람이나 개나 보통의 삶을 산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개가 옆집 개들처럼 긴장을 풀고, 느긋하게 밥을 먹고, 걸어주기를 내내 기다렸다. 

 



이어지는 글과 사진이 궁금하시다면, 

신간 <우리는 안아주는 사람일 뿐>을 구매하시어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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