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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아 Apr 06. 2022

몸살 나지 않도록

하루는 엄마가 꽃모종을 사 왔다. 엄마가 돈을 주고 꽃을 사다니, 별일이었다. 우리 집에 있는 화분은 대부분 엄마가 동네 아주머니들과 주고받은 것이다. 식물은 본래 번식하는 것이니, 꽃 잘 키우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우리 집 구문초와 너희 집 베고니아를 교환하자, 하는 식의 거래가 쉽게 성사되는 것 같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면 집집마다 키우는 식물은 다 비슷해지고, 이제 더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사야 한다. 엄마는 그 욕구를 오래도 눌러왔다. “어휴, 내가 나한테 이것도 못해?” 하면서 엄마는 품에 있던 ‘랜디 제라늄’ 모종을 거실 한편에 내려놓았다. 그러면서 화분으로 옮기는 건 내일 할 거라고 설명했다. 오늘은 들고 오느라 꽃이 몸살이 났기 때문이란다.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다친 꽃잎이나 줄기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화분으로 옮기는 작업까지는 무리란다. 꽃을 애지중지하는 엄마를 보면서 다행이다 싶었다. 무엇을 소중히 하는 마음은 자신을 소중히 하는 것과 같으니까.


한 달을 보내려 남해에 온 오늘, 온몸이 쑤신다. 팔목, 어깨, 종아리 다 당긴다. 서울에서부터 들고 온 트렁크도 원체 무거웠는데, 삼천포터미널 앞 홈플러스에서 장도 한가득 봤다. 원래는 택시를 타고 숙소까지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눈앞에서 절묘하게 25번 버스가 딱 멈춰 섰고, 홀린 듯 버스에 올라타 버렸다. 문제는 버스에 내려서 숙소로 올라가는 길. 지도상으로는 10분 거리인데, 길이 가파르고 짐이 무거워서 30분 가까이 걸렸다. 이 펜션인가? 저 펜션인가? 문득 인터넷으로 본 사진에서 펜션 뒤에 나무밖에 없었던 기억이 났다. 아, 제일 높은 곳에 있는 펜션이구나. 모래사장에서 허리에 밧줄 칭칭 감고 타이어를 끄는 태릉 선수들이 자꾸 생각났다. 내 모습 같아서. 오늘은 그저 무사히 도착한 것으로 충분하고, 이제 저녁밥 챙겨 먹고 누워 있자고 생각했다.


우리 몸은 단기 여행과 장기 여행, 장기 체류를 구분하는 것 같다. 가 2박 3일 여행하러 왔는지, 한 달 천천히 머물려고 왔는지, 일 년 살려고 왔는지 다 아는 것 같다. 그래서 단기 여행 때는 도착 당일부터 이리저리 돌아다녀도 별로 힘들지 않은데, 머무는 기간이 길수록 초반에 적응 시간이 들어간다. 마음가짐이 달라서 그런가 보다. 오늘은 내가 내 몸을 고생시킨 탓도 있지만 말이다. 전에 교정교열 작업한 <식욕의 과학>이라는 책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었다. 고향에서 먼 곳으로 대학을 가거나,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면 살이 찌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우리 몸에서 먼 이동을 위험으로 인지해서 그에 대비하기 위해 몸집을 불리기 때문이라고 한다(이민의 경우, 이민 간 나라의 식습관도 중요하다). 또 다른 경우로, 결혼을 해도 살이 찐다. 남자, 여자 모두. 가정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임신을 준비하기 위해 영양 상태를 좋게 해두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언니한테 했더니, "내 몸이 내가 결혼한 걸 어떻게 알았지?" 한다. 눈치 없이 눈치 빠른 몸이 미운 눈치였다.


그럼 며칠부터가 장기 여행일까. 나는 손톱깎이를 기준으로 삼는다. 손톱깎이가 필요하면 장기 여행이고 안 필요하면 단기 여행이다. 경험상 열흘 정도는 여행 전날 손톱을 짧게 깎으면 손톱깎이가 필요하지 않았다. 내게 그 이상은 장기 여행이나 체류다. 가방에 손톱깎이를 챙기면, 비장함이 5정도 추가된다. 숙소에 들어와서는 우선 장 봐 온 물건부터 냉장고에 채워 넣었다. 벽에 달린 거울로 나를 보는데 하얀색 셔츠의 어깨 쪽이 땀에 젖어 살이 다 비쳤다. 넓게 난 창문으로는 가까이 바다가 보였다. 걸어서 10분이면 닿을 수 있을 거리다. 하지만 바다의 짠 냄새가 날 정도로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그래서 넓은 강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래도 내 몸은 내가 바다 근처에 왔다는 것도 알 것 같다. 똑똑. 펜션 사장님이 문을 두드리고 2L 생수 여섯 병을 가져다주신다. 이어지는 사장님의 설명은 사투리 때문인지 말투 때문인지 표현 때문인지 몇 마디는 못 알아들었다. 그런 사장님 뒤로 울창한 편백나무 숲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편백나무 냄새도, 들리는 언어도, 당기는 종아리도, 눈에 담기는 바다도 모두 아직은 낯설다. 그날 우리 집에 온 랜디 제라늄도 그랬겠지. 랜디 제라늄은 그 다음 날 화분으로 잘 이사했고 잘 자리 잡아 예쁜 꽃을 피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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