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불꽃지 Aug 15. 2023

수 놓는 삶

앞으로 나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거

@청청현

집 앞에 예쁜 자수집이 생겼다.

나지막한 길가 건물 1층 쇼윈도에, 자수 작품을 꽃과 함께 디스플레이하고

안쪽에서는 내 또래의 여인들이 그림같이 앉아 수를 놓는다.


정적이고, 미적이며, 시적이다.

마치 조선시대 병풍을 펼쳐 놓은 거처럼......


요즘 같은 시대, 요즘같이 바삐 돌아가는 인생사에 도저히 끼어들 수조차 없는 일이기에,

그림이라는 풍경으로 박제해 버린 병풍 같다.


그런데, 신기한 건 이 자수집이 계속 신경 쓰인다는 거다.

언젠가부턴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마음이 간질간질, 간지러워진다.

최대한 안에 있는 사람들과 눈이 안 마주치게, 지나가는 척 슬쩍 구경하기 위해서다.


왜,,,,

대놓고 보고 못 할까?

보라고 만들어 놓은 쇼윈도인데.....

음,,,,

정면으로 그 세계와 마주하면,

나도 모르게 안으로 쏙 빨려 들어갈 거 같아서???

즉,,,,

그렇다.

사람은

너무 매력적인 것 앞에선, 힐끗거리게 된다.




대전에 오니 동네에서 이런 공방들을 솔솔치 않게 볼 수 있다.

도예공방, 조각공방, 오카리나제작소, 꽃꽂이 클래스 화원, 목가구 공방, 목공예 소품 공방, 퀼트공방, 수예점, 아로마테라피, 금속공예공방, 베이킹ㆍ마카롱 오픈키친 등등


집 앞에서 걸어 다니며 본 곳들이 이 정도다.

이곳이 핸드메이드 특화마을???......


임대료 비싸고 바쁘게 사는 서울에선 매우 보기 힘든 문화다.


서울에서 독립서점이라 하면,

왠지 희귀본 몇 권쯤은 보유하고. 독립출판사를 끼고 있다든지, 주인이 작가이든지. 뭔가 독특한 개성이 있어야 할거 같은 느낌이라면, 여기의 독립서점은 그야말로 동네책방이다.

책 좋아하는 주인이 본인이 가진 책에서 시작해 읽고 싶은 책으로 채우다가 마음 맞는 독서토론회가 만들어지고 컬렉션이 다양해진다. 부모를 따라오는 아이들로 인해 동화책이 하나 둘 늘어나다가 아이들 대상의 독서교육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다양한 연령의 동네사람들이 참새 방앗간처럼 드나드는 곳이 되어 버린.

그야말로, 동. 네. 책. 방.




일상의 요구와 필요에 의해 자연스럽게 조성되는 동네 구조가 신선하다.

경제논리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도시정책???

,,, 동네 모양새에서 그 어떤 의도도 없어 보인다.

도시 브랜딩???

처음부터, 아무도, 그 어떤 생각도, 하지 않은 게 오롯이 대놓고 보인다.

브랜드 마케팅???

프랜차이즈 매장조차도 그냥 필요에 의해 들어온다. 유명하다고 다 있는 게 아니다.

한 물 갔다고 다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20대 추억 속의 '투다리'를 여기서 다시 봤다. 


그런데...

신선한 건,

진하게 느껴지는 이곳만의 풍경이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 길을 닦고 구획하고 개발한 건 시의 정책일지언정,

그 뒤에 동네를 채워가는 건.  그곳 사람들의 삶이라는 것!!

그냥 동네를 걸어도 느껴진다.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주부가 혼자만의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

아빠들은 대략 몇 시쯤 퇴근하는지,

그들의 저녁식탁에 대충 어떤 메뉴가 올라오는지,,,,,,

사춘기 청소년들이 어떻게 스트레스를 풀고 노는지,,,,,,

20살 청년이 되면 이 동네에 없구나 하는 것도,,,,

그래도 직장인들이 다니는 회사가 어느 골목에 있으며,,,,, 대충 거의 다 야근 없이 칼퇴를 한다는 것도, ,,,




그래서, 나는 이곳이 새롭다.

시끄러운 홍대입구 앞에서 자라서,

한강 고수부지를 따라 신혼집을 옮겨 다니다가,

서울에서 어린이 비중에 가장 높은 송파구에 정착해 육아를 하고

뜬금없이 한 순간에 지방으로 내려온 나에게는 문화적 충격이었다.


뭐든 쉽게 드러난다는 것도 어색하지만 정말 적응이 안 되는 건,

투명하기만 한 이 동네에서 내가 원하는 걸 찾을 땐,

모든 것이 불투명하게 베일에 싸여버린다는 거다.

상식이라 여겼던 원래의 방식으로 원하는 걸 찾을 수 없다.



적정 예상 수준의 기준이 잣대가 되는 나의 상식 틀은

승인된 구획 안에서만 통하는 와이파이 같은 거였다.


프랜차이즈의 맛이 통일되지 않는다.

구현 기술이 제각각이다. 서비스는 그날의 기분이다.

지불되는 금액만큼의 합당한 대가가 안 올 수도 있고, 훨씬 더 올 수도 있다.

공용 와이파이를 끄고 개별 데이터로만 살아가는 세상이랄까?


숨겨진 고수의 실력은 생애 처음 만나는 하이레벨이다.

잘하는 사람은 너무 잘하고

대충은 그 대충도 안 되는 바닥이며,

그래도 이래저래 어우러져서 특색이 만들어지는 곳이 지방이랄까.





이런 지방에서 갱년기의 인생고비를 보내며 

크게 깨달은 것이 있다. 어쩌면,

이 걸 깨우치라고 내가 여기까지 온 건가 보다.


'삶의 매듭'은 없다는 걸,

중간 종착지에서 매듭을 진다고 새롭게 시작되는 게 아니라는 걸,

삶은 이전 삶을 매듭짓고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는 박음질이 아니라는 걸,



인생은

한 걸음 뒤로 갔다가 두 걸음 앞으로,

다시 한 걸음 뒤로 갔다가 두 걸음 앞으로,

따박따박 정확히 빈틈을 채우며

앞으로만 나아가는 박음질이 아니다.




그저 왔다 갔다,,







그 자리를 그럭저럭 메꾸다 보면 무엇인가 그려지는 자수 같은 거,
왔다 갔다 하면서 우왕좌왕 만들어가는 게 인생이라는 거,
그래서 제자리걸음도, 후퇴도 다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거,
작품은 끝나도 작가는 끝나지 않는다는 거,
끝없이 미련 남는 미완의 작품이 인생이라는 거,
그래서, 죽고 싶게 힘들어도 꾹꾹 참으며 제자리에서 살아가는 게 인생이라는 거,



앞으로 나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거,



@청청현


이전 17화 가족의 세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