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빨간 삿춘기
지구의 역사가 빙하기 간빙기를 번갈아 맞이하듯 사춘기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살짝 벗어나 간빙기가 찾아온 것 같다. 물론 이러한 평화는 부침개 뒤집듯 하루아침에 뒤집히지만 내 마음에 여유가 생긴 것만으로도 큰 발전이다. 그분은 여전히 예민보스이며 작은 일에 불같이 화내고 지가 필요할 때만 태세 전환하는 면모로 일관하고있다. 다만, 이전과 달라진 것은 내가 불같이 맞대응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서서 저 인간이 언제 사람 되나 기우제 지내듯 마음을 조금은 내려놓았다는 데 있다.
분명 지난 주말에 정말 칭찬받아 마땅한 자세로 숙제를 열심히 해서 이번 주 중은 좀 한가롭게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건 뭐. 시간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 장을 가지고 세월아 네월아~ 날 잡아 잡숴의 자세로 뒹굴거리며 하는 둥 마는 둥 하니 어제도 심야의 시간까지 숙제가 늘어졌다. 중간에 조용해서 가보니 국어사전까지 동원해서 그림 그리며 키득대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자니 가슴속에 천불이 올라왔지만 어금니 꽉 깨물고 '빨리하고 자야지.'만 이야기하고 나왔다.
<팔 잘리고 머리 잘리고 지구 탈출하고 온갖 검술이 난무하는 졸라맨의 세계이다. 출처: 후님 공책>
만화를 8장 연재하시느라 숙제를 못하셨단다. 배에 깔고 공부하는 척하며 엄마 몰래 만화 그리면 얼마나 재미날까? 순서를 바꿔서 할 일 다 하고 놀면 좋겠는데 정말 수백 번 수천번 고치려 해도 쉽지 않다. 결국 노트 뺏기고 방에서 온갖 불평불만을 배설하듯 쏟아내며 결국 이 모든 게 엄마 탓이라며 숙제하다 잠들었다. 예전 같으면 소리 지르고 등짝 얻어맞고 눈물 쏟고 했겠지만 나도 내려놨는지 기운 빠졌는지 적당히 개입하려고 노력했다. 전교 1등처럼 공부하다 잠든 모습을 보니 원망했던 마음이 짠한 마음으로 바뀌어 불 꺼주고 이불 덮어주고 아이 방에서 나왔다. 왜 저러고 사는지 너도 힘들겠다 싶다.
늦게 잠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쌔근쌔근 잠든 아들을 보니 맛있는 밥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어젯밤에 예약취사로 갓 지은 밥으로 스팸무스비를 만들기로 한다. 바쁜 아침이니 항상 10분 컷 요리만 한다. 노력대비 맛이 좋고 아이가 좋아해서 백전백승 메뉴 중 하나라 기쁜 마음으로 만들었다.
김밥용 김을 1/3로 자른 후 밥 한 숟가락 스팸 한 조각 계란 프라이 찢어서 올리고 말면 끝.
난 어제 남은 샌드위치 한 조각으로 아침을 먹고 아이는 김밥 무스비로 맛있게 먹고 등교했다. 오늘 영어과외가는 날이라 지난주처럼 신들린 연기 하며 가기 싫다고 할까 봐 슬쩍 걱정되지만 속는 셈 치고 믿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