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연말, 내 앞으로 우편 하나가 날아왔다. 국민건강보험에서 온 우편이었다. 열어보니 눈에 띄는 빨간 창. 안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피부양자 자격 상실 예정 안내
분명 우리나라 말인데 해독이 되지 않았다. 첫 번째 단어부터 차근차근 이해해보기로 했다.
첫 번째, 피부양자.
누군가의 부양을 받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내가 피부양자라는 말은 남편이 나를 부양하고 있다는 의미일 테다.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가 되면서 나는 2월이 아닌 5월에 소득신고를 하게 되었고, 임용이 된 남편은 직장인 학교에서 2월에 연말정산을 하게 되었다. 회사에 다닐 때도 연말정산 서류를 뗄 때는 적잖이 골머리를 썩었던 터라 남편의 연말정산은 강 건너 불구경했는데, 강 건너에서 남편이 나를 자신의 피부양자로 등록했던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남편의 부양을 받는 인구로 관리되고 있었다.
두 번째, 자격.
내가 퇴사해 그의 피부양자가 된 해, 그러니까 2021년에는 내게 피부양자의 자격이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누군가의 부양을 받을 자격. 누군가를 부양하는 데만 자격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부양을 받는 데도 자격이 필요했다.
세 번째, 상실.
내게 있었던 ‘부양받을 자격’이 곧 상실된다. 여기에 관해서는 빨간 창 아래 표의 설명이 필요하다. 부양 자격 미충족 요건에는 ‘소득 요건’이라는 말이 적혀 있다. 그러니까 나는 어느 정도 이상의 소득이 생겨, 부양 받을 자격을 잃게 된다. 이 때의 소득은 2022년, 그러니까 내가 피부양자가 된 다음 해의 소득을 말한다. 퇴사 다음 해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해, 부양받을 자격을 잃게 되었다. 바꿔 말하면 더 이상 누군가의 부양을 받지 않아도 되는 인구가 되었다.
네 번째, 예정.
이 단어는 앞의 전제에 반하는 단어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부양받을 자격을 ‘잃게 된’ 것이 아니라 ‘잃게 될 예정’이다.
다섯 번째, 안내.
그러니 이를 미리 알려준다는 내용의 우편이었다. 빨간 창 아래에는 굵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다.
별도의 신고가 없는 경우 피부양자 자격이 상실되며, 지역가입자로 전환되어 지역보험료를 부담하게 됩니다.
쉽게 말하자면 남편과 별개로 내 건강보험료를 내야 한다는 거였다. 그렇다면 별도의 신고란? 2023년에는 내가 이만큼의 소득을 얻지 않았다는 신고다. 2023년이 되자마자 나는 임신을 했고, 절박유산 진단을 받으며 하고 있던 모든 일을 내려 놓았다. 임신 안정기에 접어든 후에는 끊이지 않고 출산 전날까지 일을 했지만, 말 그대로 ‘끊이지 않는다’는 의미만 있었을 뿐 이전 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양이었다. 그러니 이전 해와 비교해 소득이 턱없이 낮은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불 보듯 뻔한 일도 서류로 증명해내지 않으면 결코 뻔한 일이 될 수 없다. 2022년에 일했던 거래처에서 2023년까지 계속 일하지 않았음을 보여야 했다. 국세청 홈페이지에서 2022년 소득을 조회한 후, 작업료를 입금받은 거래처와 입금액을 모두 적었다. 이 중 2023년에 일하지 않은 거래처에 연락해 해촉증명서를 받아야 했다. 2022년에 나와 한 업무 계약은 그 해에 끝났다는 걸 증명하는 서류다.
엉겁결에 프리랜서를 시작한 후, 프리랜서 인터뷰를 읽으면서 해촉증명서라는 서류를 알게 되었다. 나중에 난처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으니, 작업 후 모든 거래처에서 꼭 해촉증명서를 받아두라는 당부였다. 당장 일하기에 바빴던 나는 당장 쓸 일이 없던 그 서류를 기억에서 잊었다. 빨간 창의 경고를 읽고 나서야 부랴부랴 몇 곳의 거래처에 연락을 했다. 빨간 창이 내게 준 서류 마감일을 3일 남겨둔 시점이었다.
“담당자님, 잘 지내시죠? 작년 봄에 함께 작업했던 에디터입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제출할 일이 생겨서 해촉증명서 발급을 요청드려요. 업무 중 바쁘시겠지만 모레까지 부탁드립니다.”
“에디터님, 안녕하세요. 제가 퇴사한 지가 오래되어, 다른 분께 연락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두 명의 퇴사자를 거치고 나서야 해촉증명서를 받을 수 있었다. 연락처를 건네받은 이에게 불쑥 연락하기도, 하루하루가 정신없을 걸 알고 있는 상황에서 이틀 만에 달라고 요청하기도 난감했다. 책 속 프리랜서 선배가 말한 ‘난처한 상황’이 이런 거였구나. 틀림없이 그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을 터였다. 담당자들의 호의 덕분에 마감 직전에 준비한 서류를 모두 보냈다. 나와 같은 상황을 겪은 프리랜서들의 블로그를 뒤지고, 국민건강보험 고객센터에 몇십 통씩 전화를 하며 단시간에 이뤄낸 쾌거였다.
쾌거인가. 모바일 팩스를 보내고 뿌듯하게 기지개를 켰는데, 개운하지 않았다. 내가 보낸 서류에 이상이 없다면 나는 피부양자 자격을 유지하게 된다. 무사히 '누군가의 부양을 받는 인구'로 관리되는 것이다. 가벼워진 어깨 위로 피부양자라는 네 글자가 무겁게 내려 앉았다.
남편이 대학교 1학년, 내가 2학년이던 가을에 우리는 처음으로 단둘이 밥을 먹었다. 학교 앞에 온 그에게 스테이크를 먹자고 했는데, 순간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대학생에게 스테이크는 기념일에나 먹던 고급메뉴였던 것이다.
내가 그를 데리고 간 곳은 특별한 날만 가는 스테이크 하우스가 아니었다. 인심 좋은 아주머니가 흑미밥과 찹스테이크를 5000원대에 내어주는 학교 앞 스테이크 가게였다. 그날 점심을 먹고 헤어진 후 우리는 몇 번 연락을 하다 서로의 남자친구, 여자친구가 되었다.
“처음 만났을 때 나 어디가 좋았어?”
“스테이크 먹으러 간 날 있잖아. 그때 네가 100원짜리까지 네 밥값을 칼같이 계산하는 거야. 그게 왠지 멋있었어.”
10년이 흐른 후에야 들은 의외의 대답이었다.
내가 신입사원이 되었을 때도, 승진해 대리가 되었을 때도 그는 여전히 학생이었다. 데이트 비용을 낼 때는 늘 농담을 섞어 큰소리를 쳤다.
“돈은 내가 낼 테니, 너는 맛있게 먹기만 해.”
결혼 후 그의 시간강사료는 7년차 정규직 직장인이던 내 월급에 미치지 못했다. 다른 부부들처럼 공금 같은 건 없었지만, 관리비나 생활비 고지서가 날아오면 남편이 알기 전에 내가 잽싸게 내곤 했다.
‘저 친구 잘 안 되면 내가 먹여 살려야지.’
생각하면서 뿌듯해했다. 매일 속을 졸이고 마음을 상해가며 일해도 그렇게 번 돈으로 소중한 사람을 먹이고 살린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우리가 연인이던 때, 푸념하듯 그가 ‘나도 그냥 회사 갈까’ 하고 말을 꺼내면 한사코 말리던 나였다. 계속해 왔던 일을 포기하지 말라며, 나는 내가 벌어 먹고 산다며, 너도 내가 먹여 살려주겠다며 웃던 날이 있었다.
그랬던 내가, 어느 순간 서류에서 그 사람의 부양을 받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관리비는 내가 볼 새도 없이 그의 계좌에서 자동으로 빠져나갔다. 온라인으로 장을 볼 때는 결제 버튼을 누르기가 망설여졌다. 자동 등록된 온라인 쇼핑몰 결제카드는 그의 것. 우리의 것이 아닌 내 것은 내 카드로 결제했다. 내 카드를 쓰면서는 불안했다. 제대로 된 수입없이 지출만 쌓여가는 날들. 언제까지 이래야 할까. 앞이 캄캄했지만 남편에겐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당당히 내 몫의 스테이크값을 계산하던 뒷모습에 반했다던 그였으니까.
그래서였을 것이다. 출산 후 5개월, 몸도 마음도 준비되지 않은 시점에 찾아온 기회를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그대로 덥석 잡아버린 것은. 새벽 6시면 일어나 아기를 돌보다 밤 9시에 아기를 재우고 거실소파에 쓰러지듯 눕던 일상도 어느 새 익숙해지던 시점이었다. 하지만 내가 간과했던 건, 익숙해졌다고 해서 괜찮아진 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글쓴이의 말
'피부양자 자격상실'을 검색하다 제 글을 읽게 되신 분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오래 고민했습니다. 피부양자 자격 유지 서류에 관한 정보 대신 피부양자라는 말에 얽힌 제 생각을 적어내려간 글이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분들께 누가 될 것 같아서입니다.
이 글을 썼던 당시에는 누군가의 부양을 받는 인구로 관리된다는 사실에 마음이 쪼그라들기도 했던 게 사실이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만은 않습니다. 저는 이전처럼 회사의 월급을 받고 있지는 않지만 아이도 키우고 일도 하고 있으니까요. 정해진 금액으로 책정되는 일을 하지 않는 것뿐 저도, 이 글을 읽는 분들도 하루하루 부지런히 일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오늘 열심히 일한 자신을 토닥여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저부터 최대한 저에게 너그러워져 볼게요. (토닥토닥)
+)
'피부양자'라는 용어가 다른 용어로 대체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책정되는 수입이 가족구성원보다 적다는 이유로 피부양자라 불리기엔, 우리는 스스로를 비롯해 많은 이들을 먹여 살리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