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편: 판단도 소유다

– 법정스님의 무소유에서 배우는 관계의 철학

by TK

4편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해 보려 한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모든 것을 갖게 된다."

법정스님의 이 말은 오래전부터 내 안에 남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의미를 너무 좁게 이해해 왔는지도 모른다. 집을 줄이고, 옷을 정리하고, 물건을 덜 사는 것만이 ‘무소유’라고 믿었다.


그러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판단도, 기대도, 고정관념도… 결국은 일종의 소유 아닐까?”


우리는 너무도 쉽게 사람을 설명한다.

“그 사람은 원래 그래.”

“쟤는 ADHD야.”

“걘 좀 감정 기복이 심해.”

이 모든 말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타인을 ‘정의함’으로써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것. 마치 상품에 바코드를 붙이듯, 사람에게도 레이블을 붙인다. 그리고 그 레이블을 내 마음대로 해석하고 예측하고 실망하며 관계를 이어간다.


그것은 물건보다 더 위험한 ‘무형의 소유’다.


불확실성은 불편하다. 사람은 계속 변하고, 상황은 계속 흐르며, 오늘의 그 사람이 내일도 같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 변화 앞에서 우리는 안심하고 싶다. 그래서 ‘설명 가능한 형태’로 상대를 고정한다. 그 순간 판단은 시작되고, 소유는 작동한다. 우리는 그 사람을 소유한 게 아니라, 내가 만든 이미지에 사로잡힌 것일 뿐인데도.

더 나아가 보면, 나는 내 감정을, 내 판단을, 내 말조차도 완전히 소유하지 못한다. 한 번쯤은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입 밖으로 나온 말이 내가 원했던 게 아니었고,
떠오른 감정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한때 확신했던 생각이 하루 만에 흔들린 적도 있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내 안의 생각조차 온전히 소유하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타인을 소유할 수 있을까? 그리고 왜 하려고 하는 걸까?

무소유란 단순히 ‘비우는 삶’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을 비우는 삶이다.

판단을 유보하는 태도,

관계에 이름을 붙이지 않는 연습,

내 방식대로 타인을 정의하려는 습관에서 한 발 물러서는 것.

그것이 ‘관계의 무소유’다.

사람은 테니스공이 아니다. 정확히 날아가지도 않고, 때로는 굴절되고, 때로는 멈춘다. 그것이 인간의 방식이다. 그렇기에 판단하지 않는다는 건, 게으름이 아니라 용기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겸손이고, 타인의 변화 가능성을 믿는 신뢰다.


무소유란,
남의 삶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저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만날 수 있다.


“우리가 소유한다고 믿는 모든 것, 사실 그 순간 그 모든 것이 우리를 소유한다.”

– TK


1편: 그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야? https://brunch.co.kr/@timothykong/141

2편: 인간도 자연이다. 자연은 ‘균형’을 따른다. https://brunch.co.kr/@timothykong/142

3편: ADHD는 진단이 아니라 가능성의 이름이다 https://brunch.co.kr/@timothykong/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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