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의 시작
동거는 어떻게 시작하는 거지. "우리..동거할래?" 이런 멘트로 시작하는 건가. 동거의 시작을 앞두고 생각이 많아졌다. J는 7살 연상인 나의 동거인. 그가 이직을 하면 우리 집에서 같이 살기로 했다. 그가 매우 성실한 남자란 걸 잊은 듯이 나는 바로 OK를 외쳤고, 예상보다 빨리 우리의 동거가 시작됐다. J가 우리 집에서 자고 가는 날은 잦았지만 같이 사는 건 다른 문제였다.
같이 산다는 건 하루종일 함께라는 걸 뜻했고, 어쩌면 보고 싶지 않은 순간에도(싸웠다던가..) 얼굴을 마주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날짜가 다가올수록 나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말로만 뱉던 같이 살자는 말이 공중에 떠서 내 살결에 닿았기 때문일 거다. J는 천천히 조금씩 그의 물건을 우리 집에 들여놓았고, 나는 내 물건으로 가득 찬 집에 그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려고 애썼다.
나는 조금 심한 멕시멀리스트다. 내가 생각해도 우리 집엔 없는 게 없다. 나는 두 칸짜리 반지하에서 자취를 시작했는데, 방도 거실도 따로 있었다. 1인 가족에게는 꽤 큰 집이었고, 나는 사람 없는 집을 물건들로 채웠다. 커피 머신, 토스트기, 오븐, 턴테이블, 전자피아노까지 나의 가족이 되었고 심지어 옷장은 4개나 있었다. 이 감당 안 되는 짐들과 빛 안 드는 방, 장마면 이마로 떨어지는 비가 알람이 되었던 터라 나는 방 3칸짜리 빛 잘 드는 집으로 이사를 오게 됐다.(제도 덕분이지 나는 빚밖에 없다)
그 넓은 집마저도 나는 그득그득 짐을 밀어 넣었기에 J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선 많은 걸 버려야 했다. 새로운 걸 위해 버릴 줄 알아야 한다는 삶의 이치를 여기서 또 배웠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들이기 위해 나의 것들을 덜어내는 일은 퍽 즐거웠다. 방을 정리하면서 그를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했고, 떠나보내야 하는 물건들엔 감사 인사를 전했다.
상상만큼 달달하진 않았으나 은근한 따뜻함이 밀려오는 동거가 시작되고 있었다. 앞으로의 집안일, 생활비, 생활 패턴 등 의논할 게 많았지만 처음이 주는 설렘에 젖어 그런 것들은 잠시 뒤로 미루어 두기로 했다. 지금도 그런 것들을 완벽히 정하진 않았지만 눈치 빠르고 배려왕인 우리는 적절히 잘 해내고 있다. J와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그런 점까지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고 알맞다. 우리의 동거는 완벽하진 않지만 우리만의 행복을 찾아가고 있다.
모든 걱정이 현실이 되진 않는다. 거의 걱정은 걱정으로 남아 사라질 뿐이다. 나의 불안도 그러했다. 괜한 두려움과 불안으로 이 행복을 느끼지 못할 뻔했다. 나는 그에게 살면서 받지 못한 사랑을 받고 있고, 준 적 없는 사랑을 주고 있다. 같이 살지 않았다면 몰랐을 그의 작은 습관과 버릇들까지도 사랑스럽다. 글을 쓰는 이 새벽 방문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잠꼬대마저 사랑옵다. 사랑하는 나의 J, 좋은 꿈을 꾸고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