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석금지 제도가 맺어준 낯선 이와의 따듯한 조우
경기도에서 빨간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는 직장인이라면 경기 광역버스 입석 금지 제도를 알 것이다. 앉을 수 있는 좌석만큼만 태울 수 있는, 그 이상 초과하여 승객을 태울 수 없는 정책이다.
대개 경기도-고속도로-서울을 순환하는 버스인지라, 이 정책으로 치이는 시민은 고속도로와 근접한 동네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이다. 이전 정류장에서 차곡차곡 탑승한 승객이 전 좌석을 꽉 채울 경우 눈앞에서 버스를 몇 대씩이나 떠나보내는 일도 더러 있다. 버스 앱을 수시로 확인하며 잔여좌석이 줄어들 때마다 긴장감은 고조된다. 탈 수 있는 것인가, 다음 버스를 타야 하는가,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힘찬 연어들처럼 전 정류장을 향해 거꾸로 거슬러 올라야 하는가.
나는 그 억울하고 불행한 동네의 주민 중 한 명이다.
이 글은 그것과 관련해 얼마 전 내가 겪은 작은 에피소드이다.
그날도 배차간격이 40분씩이나 되는 출퇴근 버스를 눈앞에서 보내고 애통한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때 같이 버스를 기다리던 분께서 어디까지 가냐고 묻길래, 판교까지 간다고 하니 잘 됐다며, 본인 차를 근처에 세워두었는데 괜찮으면 데려다주신다는 거다.
반가운 제안이었지만 거절했다. 그가 부모님 나이쯤 되어 보이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었다. 같은 동네 주민이라는, 함께 버스를 못 탄 억울한 승객이라는 동질감도 있었지만 당시엔 경계심이 더 컸다. 거절과 동시에 그의 무안한 표정을 보는 것도 내 경계심에 대한 값이었다.
그 일이 있고 몇 달 후, 그도 같은 시간에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고, 또 함께 놓친 아침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내게 픽업 제안을 했다. 나를 태워준다고 하여 누가 상주는 것도 아닌데 이번엔 더 열심히 영업(?)을 하셨다. 본인이 이상한 사람 아니라며, 다음 버스 타면 지각 아니냐고.
이번엔 거절하지 않았다. 과도한 친절이 딱히 불쾌하진 않았고, 지난번 보았던 무안한 표정에서 진심을 말해주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걸어서 1분 거리에 세워진 그의 차를 타고 20여 분을 타고 출근하는 길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그날 직장동료에게 내게 거절당한 이야기를 하니 동료는 오지랖 부리지 말라며 되려 욕을 먹었다며 하소연했다. 괜히 좀 뜨끔했고, 미안했다. 알고 보니 그는 내가 다니는 직장(이커머스)의 단골 고객이었다. 결혼 후 외국으로 이민 간 그의 딸이 나와 동갑인 점도 신기해 애틋해지기도 했다지.
오래 살았다고 자부한, 익숙하다 못해 지루한 동네에서 마주한 낯선 이와의 대화에 반가운 아침이었다.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도 허물어진 건 물론이고, 먼저 말 걸어준 그에게 고마움이 들끓었다. 우리는 내리기 직전 급하게 통성명을 했다. 지겨운 출근길이었지만, 아침 공기만큼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날은 첫 산문집의 출간 일이기도 했다.
고마움을 담아 그의 집으로 책을 포장해 택배를 보냈다. 잘 읽겠다는 그의 문자에 하트를 꾸욱 누른 것도 몇 주 전, 그 이후 그를 정류장에서 보는 일은 아직 없다. 그러나 만나서 또 함께 버스를 놓치면 따듯한 이웃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일 거라고 다짐해본다. 이제 더는 낯선이가 아니니 그가 키운다는 고양이와 이민 간 딸의 근황도 묻게 되겠지. 낯선 이에게 선행을 베푸는 선량함에 감동한 늦가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