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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시옷 Oct 11. 2024

나를 위로해 주실 분 누구 없나요?

주어를 '나'로 놓는 연습

글쓰기의 목적이 으레 그렇듯 나는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시작한 연재였는데 좀처럼 꺼내지지 않는다.

나의 단점이다.

내 이야기를 잘 못한다.

엄마의 인생은 몇 번 돌려본 인생 영화처럼 줄거리도 말할 수 있고 적절한 감상도 말할 수 있는데, 내 인생에 나는 철저하게 타인이다.

지난 연재글을 올리고 엄마의 인생을 안쓰럽게 생각하는 반응이 있었다. 엄마 이야기 앞에서 사람들의 반응은 언제나 한결같다. 그리고 나에게 돌아오는 말을 뭉툭하게 정리하자면 "엄마에게 잘하세요"가 된다.

그런 말을 최초로 들은 기억이 마산 시절이다.

명절이라 찾아온 먼 친척이나, 외할매의 병문안으로 온 사람들은 엄마의 고생을 치하한 끝에 "네가 엄마에게 잘해야겠다"라는 말을 했다.

지금 저도 고생중인데요, 라는 말은 어린 마음에 속으로만 쏴붙였다.


엄마 고생은 내가 제일 잘 알고, 내 마음이 젤 불편하구만 어디서 나한테 이래라저래라야. 고생하는 당사자도 내게 못하는 말을, 당신들이 왜 하는데


화가 나면서도 에게 잘하려는 태도를 내면화했다. 사람들이 아무런 입을 대지 않았어도 그렇게 됐을 테지만, 억울한 마음은 덜했을지 모르겠다.

시간이 흘러 그때의 억울함이 희미해질 즈음, 엄마가 나의 살림과 육아에 들어왔다. 내가 맞벌이를 하며 아이를 키울 수 있는 것은 엄마 덕분, 그것도 셋이나 키울 수 있는 것은 말할 필요 없이 엄마 덕분이다.

살 좀 빼라, 옷 그렇게 입지 마라 등 십 대 소녀가 들을만한 잔소리 앞에서 답답증이 생겨도,

해놓은 반찬을 왜 안 먹냐, 냉장고를 왜 이런 걸 샀냐, 애 불편하게 입혔다, 덥게 입혔다, 춥게 입혔다,

잔소리가 빽빽하게 일상을 물들여도

- 그래도 엄마가 다 해주시니까 얼마나 좋아.

- 다른 사람한테 맡기는 것보다 마음이 편하잖아.

-  그거 배부른 소리야, 팔자 편한 거야.

- 엄마한테 잘해드려, 감사한 거야.


엄마는 늘 그래도 되는 사람,

나는 그러면 안 되는 사람이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엄마에게 고단한 인생을 맡겨두고, 감히 불평불만을 했네,

나란 딸이란 참..'

그러나 엄마가 원해서 사서 하는 고생을 내가 뭐 어쩌란 말이냐. 내가 하는 고생은 왜 해도 되는 고생가.

한 두 번의 잔소리는 잔소리가 될 수 있지만,

생활의 경계를 넘나드는 잔소리는 성인이 된 딸의 삶을 통째로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음을 왜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을까.


적극적으로 나의 의사를 표현해보기도 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어떻게든 해보겠으니, 엄마는 그만 도와주셔라.

그러나 엄마 역시 적극적으로 내 제안을 거절했다.

눈에 보이면 잔소리지만,

눈에 안 보이면 불안하다고.

아마 불안이 가장 높게 치고 올라오는 영역은 '밥'일 것이다. 뭐 해 먹는지, 끼니마다 배달로 때워 영양가는커녕 몸에 해로운 음식을 집어넣고 있는 건 아닌지가 가장 걱정일 것이다.

(먹는 일과 건강에 왜 그렇게까지 예민하냐 하면 그동안 써 온 엄마 인생을 통해 충분히 설명되었을뿐더러,

오늘은 내 이야기를 좀 더 하기로 했으니까 넘어가자.)

언젠가부터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제 와 엄마 인생을 살라고 말하면

"그래 애 다 키웠다고 엄마는 필요 없다 이거지"하고

엄마 여지없이 오해할 것인데, 그 걱정은 차치하고라도,

딸을 위해 한 몸 희생하는 삶은

어쨌든 엄마가 선택한 인생 아닌가.

그럼 그만둘 때도 엄마의 선택이 먼저여야 부작용이 없을 것이다. 그만둘 결심을 어떻게 먹게 하느냐, 그게 참 어렵긴 하다.


아무튼 억울하다.

그런 감정이 은은하게 남아있다.

누가 나를 공감해 주든 말든 내 삶에 무슨 변화가 있다고 내가 그걸 원하는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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