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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시옷 Oct 05. 2024

엄마를 착취하는 중입니다.

착취의 끝은 '치유'기를

엄마가 아빠의 폭력에 시달리며 살 때는 엄마가 아빠와 이혼만 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외할매를 병간호 하던 마산에서의 시절은 외할매만 없으면 우리평화롭지 않을까 생각했다.

암에 걸린 외삼촌 때문에 한여름 땡볕에 병원에서 집까지 한 시간 거리를 걸어다니는 엄마를 보던 시절에는 제 정말 삼촌지만...

했다.


마지막 고생을 나 때문에,

그것도 가장 오래 하고 있을 줄 몰랐다. 

아빠는 대략 8년, 외할매는 5년, 외삼촌은 2년,

나는 12년다.

이 정도면 착취 아닌가?

알고보니 내가 제일 나 년이다.

내가 감히 그들을 하면 안 되는 거였다.

- 너는 딸이잖아? 딸은 다르지.

그 말 은 맞고 반은 틀렸다.



정신없이 세월을 보내고 보니 딸한테 아무것도 해 준게 없더라며, 엄마는 지금부터라도 나를 위해 살겠다선언다. 

그러나 그 마음이 실은 엄마를 위한 것을 나는 안다.

아니나 다를까 나와 내 새끼들에게 헌신하는만큼 보답이 돌아오지 않을 때, 아무 기대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번번이 기대가 무너질 때 엄마는 울부짖으며 한탄다.

당신 인생이 평생 남한테 받아본 것도 없이 고생만 하다가 다 간다고. 해줘봐야 좋은 소리 듣는 것도 아닌데, 당신이 미쳐서 이렇게 살고 있다고. 아무도 이렇게 사는 사람이 없고, 당신만 바보등신이라고.

옛날과 똑같은 한탄인데, 그 어느 때보다 12년 사이에 가장 많이 했다. 

나는 엄마를 바보등신 만드는 사람이 됐다.


엄마가 무너지는 지점은 항상 예측 불가능이었으므로 나는 길에서 강도를 만나는 심정으로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맸다.

객관적으로 나의 무심함이 서운함을 유발케 했다 하더라도 엄마의 반응은 누가 봐도 원망이 과했다.

보다못해 내가 "엄마 그 말은 나한테 하면 안되는거야"라고 똑같이 울부짖었던 적도 있다. 왜 받지 못한 사랑을 나한테 기대하느냐고, 제발 엄마의 결핍은 엄마가 안고 가라고, 나는 엄마의 엄마가 아니라서 기대하는 만큼의 애정을 내가 채워줄 수 없다고.

(이 은 마음으로만 했다, 간신히)

나도 어지간히 쌓인 게 많다.

결핍이란 게 '무'의 형태를 띄고 있는 게 아니다. 결핍은 그림자처럼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 끈덕지게 따라붙어서 자신을 방어하고 때로 타인을 공격한다.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존재감을 숨기지 않는데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 엄마 밥은?(먹었어?)

- 내가 언제는 느그 집에서 밥 얻어 먹은 적 있나?


- 엄마 연휴에 같이 00에 바람쐬러 안갈래?

- 됐다, 맘에 없는 소리 하지 마라


- 마 밖에 비가 오네. 자전거 타고 못 가겠다. 데려다줄게.

- 데려다 줄 생각 없는 거 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투사'다.

상대방으로부터 받지 못할 것이라 불안한 마음을

상대방이 나에게 주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해 버리고 미운 마음으로 치환하는 것이다.

서럽고 외로운 것보다 상대방을 미워하는 게 견딜만 한 것이다.

변명처럼 덧붙이자면,

엄마의 서러움에 내 탓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내가 무뚝뚝하고 잔정없는 딸인 인정한다.

나는 소소하게 마음 써서 남을 잘 챙기는 게 어렵만,

'노력형'이라 분명 애쓰는 지점이 으므로 아주 못되처먹은 딸은 아니란 말이다.

그래도 나의 무심함이  엄마의 울부짖음에 트리거가 될 때마다 육아와 살림을 기댄 게 죄인지,

맡긴 손주가 하나도 둘도 아니고 '셋'이기 때문인지,

다정하지 못한 인지,

혹은 그 모든 것을 탓해야 하는지를 몰라서

거대한 죄책감이 몰아치는 태풍 한가운데

엄마를 괴롭게 한 사람들의 행렬 끝에 나를 가장 길게 놓곤 했다.  

러다 요즘은 긴 행렬에서 나만큼은 떨어뜨려 놓으려 애쓴다. 태풍을 자주 만나면 태풍의 눈 속에 잠기는 경험을 자주 하게 되고, 태풍의 눈처럼 어울리지 않는 내면의 고요함을 보니 상황이 분명해진 덕분이다.


엄마의 감정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나에게 쏟아내는 한탄이라고 내 것은 아니다. 엄마가 받지 못한 것은 '부모'의 사랑이었고, 그건 내가 아무리 애써도 채워줄 수 없는 다른 종류다.


간신히 나를 위한 생각을 해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눈물과 독서와 사유의 시간이 있었는지 모른다.

엄마12년의 세월동안 인식의 변화가 있었는지 요즘 한탄은 '너 때문이 아니라'를 전제로 깔고 시작하곤 한다.

이제는 괜찮은 마음으로, 생활방식이나 우리의 관계에 큰 변화가 있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여전히 엄마와 나는 서로의 기대와 결핍을 채워주지 못해 마음이 상하, 손주 셋을 육아하며 살림하는 고단함은 쉽게 덜어질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엄마와 나의 고통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다.

원하든 원치않든 내가 엄마를 과소비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직면한다. 

엄마와 앞으로 남아있는 시간을 어떻게 채워갈 것인지 답을 찾다 보면 착취가 아닌 치유의 시간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연약하지만 간절한 소망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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