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제주도를 원하진 않았는데 퇴사는 고팠어요. 1

2020.09

by 느림주의자

정말 별 감흥이 없다고 생각했다. 북유럽 대신 가는 그곳이니까 내가 원했던 곳이 아니었으니까.

더군다나 출발 날짜도 돌아올 날짜도 모두 정해져 있는 여행이었기에 그는 섭섭할지 몰라도 내게는 큰 감흥이 없었다. 비행기표를 사기 전까지는


코로나가 한참 전국에 퍼지고 있던 올해 여름, 무급휴가가 판치고 퇴사 권유가 판치던 그때에 나는 자진 퇴사를 했다. 직장 내에서 괴롭던 순간들이 밤새 내 머릿속에 맴돌아 잠꼬대를 했고 겨우 든 잠에서 깨기 일수였다. 퇴근길도 출근길도 한숨으로 가득한 퇴사 직전의 나날들이었다.

정말 곧 정신병에 걸린 것 같았지만 퇴사를 마음먹기까지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렸다. 여기는 진짜 힘든 곳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던 건 입사 삼주 차였는데 말이다. 퇴사를 생각했던 건 입사 일 년 차 쯔음이었다. 어딜 가나 있는 생각이 안 맞는 사람과 나는 되지만 너는 안돼 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상사에게 싫은 소리를 잘하는 나를 상사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할 말은 다 하지만 큰 실수를 하지는 않는 직원. 뭐하나 걸려봐라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실제로도 그들은 뭐 하나 실수하면 눈에 레이저를 켜고 입에서 불이 나도록 나무라기 바빴다.


정신과를 찾아보려 할 때쯤 몸에 병이 찾아왔고 난 결국 회사를 떠났다.

사실 내가 퇴사를 하지 못했던 이유 중에 하나는 남자 친구와의 약속도 있었다. 늦은 입대를 하게 된 그와 제대할 때까지 회사를 다니면 제대 날짜에 맞춰 내가 꿈에만 그리던 북유럽 일주를 떠나기로 했다. 약 2년 동안 틈만 나면 퇴사하는 내 후임들, 정신이 나가 있는 나,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 줄을 잇는 그곳을 보면서 그는 일찌감치 내게 ‘코로나 생겨서 북유럽도 못 갈 것 같고 너무 힘들면 그때까지 버티지 말고 그냥 그만둬요. 이미 충분히 버텼어. 코로나 사라지면 북유럽 가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보다도 한 입으로 두말하는 내가 한심했을뿐더러 같은 상황에 더 높은 직급까지 더 오랜 기간 일한 사람들도 있을 텐데 이만큼만 하고 그만두려 하는 나 자신이 작아졌고 창피하기도 해서 이를 악물고 버틴 것도 있었다. 하지만 몸과 마음에 성한 곳이 더는 없었고 나는 그렇게 일자리가 점점 없어지는 코로나가 한참이던 그때에 결국 자진퇴사를 했다. 일단 싫은 건 치웠으니 북유럽은 못가도 모든 면에서 행복해질 줄 알았다.


꿈에 그리던 퇴직을 했는데 그렇게 좋지가 않았다. 퇴직금이 들어왔다. 생각보다 훨씬 적은 돈이 들어왔고 내 머리는 하얗게 불타올랐다. 모아논 돈이 있지는 않았다. 고작 오백만 원 조금 안 되는 돈? 이십 대 후반인데 말이다. 21살에 휴학을 했고 워홀을 다녀왔다. 그곳에서 여행에 바람이 들어 7년 동안 돈을 모으는 족족 여행을 떠났다. 그렇게 떠났는데도 조금 더 아껴서 더 다닐껄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부모님 도움도 거절하고 다니던 나였기에 사실은 더 아낄 돈도 없었다. 그래서 북유럽도 2년 치 퇴직금을 받으면 그 돈으로 가려고 했던 건데 1년 6개월치의 퇴직금은 상상 이상으로 적었고 이것저것 정산을 하니 남는 돈은 고작 삼십만 원 정도였다.

모든 것이 싫어서 그곳에서 나왔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북유럽 한 달 살기는 못해도 제주도 한 달 살기라도 하자는 그의 말에 나는 무조건 예스야 라는 말을 외쳤지만 퇴직 후의 나는 여행경비 때문에 또 다른 일자리가 필요해져 버렸다.


일단 나는 일을 할 수 있는 개월 수가 짧았고 발바닥 염증이 심각하게 안 좋아진 터라 서서한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게는 앉아서 하는 직업의 경력이 없었고 무모함만 있었다. 30 군데가 넘는 곳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고작 5 군데에서만 면접을 봤고 아무 곳에서도 나를 찾아주지 않았다. 내일 일을 가지 않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걱정이 산더미처럼 늘어나면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이 휘몰아쳐 내 가슴에 주먹질을 했다. 자책을 했고 꽤 많은 눈물을 흘렸다. 나를 행복하게 해 줬던 것들에 대해서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자꾸만 후회가 됐고 사랑했고 좋아했고 자랑스러웠던 나의 과거가 이딴 상황 때문에 작아지고 후회됐고 바꾸고 싶기까지 했다. 결국 앉아서 하는 일은 찾지 못했지만 예전에 일을 했던 빵집 사장님과 연이 닿아 서서하는 일이지만 몇 시간 안되기에 일을 하기로 이야기를 했고 그러고 나니 거짓말처럼 그날 밤 잠에서 한 번도 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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