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여동생보다 앞서 큰언니는, 마흔셋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당뇨 쇼크사였다. 언니는 세상에 없는 효녀였고 둘도 없는 살림 밑천이었다. 가난한 집 큰딸로 초등학교를 나오자마자 공장을 다녀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다. 막내 여동생까지 세상을 떠난 날, 나는 믿지도 않는 신을 원망하며 울었다. 둘은 천사라고 불렸다. 세상에 둘도 없을 만큼 착하고 또 착했다. 그런데 왜!!!
울고 있는 내 어깨를 아들이 보듬었다.
“엄마, 하느님이 그만 고생하라고 일찍 데려가신 거예요.”
되돌릴 수 없는 일.
되돌릴 수 없는 목숨이다.
그래, 하느님도 착한 사람을 좋아하시겠지.
언니랑 바로 밑 여동생은 막냇동생이 죽기 전에도 뉴욕에 다녀왔었지만, 또다시 뉴욕을 갔다. 우리는 집 정리를 해주고 막내 여동생이 동생이 자주 걸었다는 길을 맨발로 걷고 왔다.
무학이었으나 글을 깨친 엄마는 동네 사람들에게 춘향전, 심청전, 배비장전 등을 읽고 동네 아줌마들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는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내가 작가가 된 씨앗도 거기서 텄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엄마는 한 가지 우리에게 잘 못 가르친 게 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살아야 한다.”
엄마가 늘 했던 말이었다. 우리 수준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도 그리 만나야 탈이 없다고 말했었다.
같이 검정고시 공부를 했던 친구의 엄마는 말했다고 한다.
“너는 국민학교밖에 못 나왔지만, 너보다 더 많이 배우고 나은 사람을 만나라.”
그래서 그 친구는 대학을 나온 사람과 결혼했다고 했다. 그리고 검정고시를 치르고 대학을 가서 끝내 영양사가 되었지만 우리 집 딸 다섯은 솔잎을 먹고사는 사람들을 만나 애를 쓰고 살았다.
하루에 백 개씩 뽑아 올리는 좀돌팥 싹처럼, 언제 뿌려 놓았는지도 모를 기억들이 뽑혀 올라왔다.
끝없이 올라오는 생각들.
나는 그것들과 새롭게 싸워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