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좌 사회생활백서(2)
작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나의 식이습관을 커밍아웃하지 못했다. 사람을 만나면 식사를 하는 게 예절이라 생각했고, 누군가 만난다면 당연하다는 듯 식사를 해야 했다. 그러던 날. 이 년 가까이 참여한 글쓰기 모임이 막을 내리고 뒷풀이겸 식사자리에 참여했다. 인원은 많지 않았다. 네 명 정도. 이 년에 걸친 글쓰기 모임을 견딘 명예의 인물이었다.
매주, 이 년동안 본 사람들과의 식사자리는 조촐했다. 지금은 사라진 일산의 자유 청소년 도서관에서 가까운 분식집이었다. 분식이란 자고로 1인 1식을 하는 식당. 모임을 진행하던 선생님부터 자연스럽게 모두 1인분의 메뉴를 골랐다. 나는 갈등했다.
“아, 저는 김밥 한 줄만 먹을게요.”
반란이었다. 다 같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김밥 한 줄이라니. 사람들이 잔치국수나 비빔국수를 떡하니 시키는데, 1인석을 차지해 놓고 김밥 한 줄이라니. 나는 말을 덧붙였다.
“많이 먹지도 못하고 배가 안 고파서요. 김밥 한 줄이면 돼요.”
조금의 눈초리가 있었지만, 이 년간 만나온 사람들은 나를 받아들였다. 인정이 넘치는 분식집은 곱빼기 메뉴까지 있었고 누구는 곱빼기를, 누구는 김밥 한 줄을 앞에 두고 식사를 했다. 사람들은 맛이라도 보라며 내게 음식을 덜어줬다. 덜어주는 양이 점점 많아지자 나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식이장애가 있고, 과식을 하면 구토를 하는 버릇이 있다고.
“왜 그간 얘기를 안 했어?”
도서관지기 선생님이 물었다. 나는 ‘말할 타이밍을 못 잡아서’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속마음은 조금 달랐다. 식사라는 건 음식만이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자리이지 않나. 그런 자리에서 자꾸 먹지 않으면 누구와도 마음을 나눌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나마 그때 용기를 낸 것은 이 년간 매주 글을 본 사람들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숨기고 싶은 일도, 자랑하고 싶은 일도 잔뜩 글로 써서 나눠 본 사이이니까.
떨리는 마음으로 김밥 한 줄을 시킨 날. 사람들은 김밥 한 줄을 받아들였다. 힘들어하면서까지 먹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다. 그날이 식이장애 환자 겸 소식인으로서 처음 인정받은 날이었다.
식이습관 커밍아웃
그 뒤, 나는 조금 더 당당해지기로 했다. 식이장애를 앓고 있다는 걸 글로 써서 공개한 것이다. 쓴 글은 많은 사람이 읽을 수 있게 SNS에 공유했다. 누가 읽고, 누가 읽지 않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의외의 인물이 다시 내게 용기를 줬다.
의외의 인물은 모 여행작가님이었다. 매번 여행을 다니시기도 하고, 평소에는 태국에서 지내기 때문에 얼굴을 자주 본 사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국에 들어오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용기 내어 점심을 먹자고 연락했다. 호쾌한 작가님은 나의 식사요청을 쿨하게 승낙했다.
약속한 날. 신촌에서 작가님을 만났다. 가장 난감한 경우가 이런 경우인데, 내 바운더리에 누군가 놀러 왔을 때다. 이럴 때는 어디를 갈지 내가 정해야 하고 이끌어야 하니까.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상대의 마음을 살폈다. 무엇을 먹어야 좋은 마음을 나눌 수 있을까. 그런데 작가님은 나에게 먼저 식당을 제안했다. 이곳은 내 활동지역인데.
“여기 근처에 채식 식당이 있다는데 거기 가 볼래요?”
채식식당. 보통 채식 식당을 권하지는 않는데. 게다가 자주 본 사이도 아니고 여기는 내 활동지역인데 채식 식당을 권하시다니. 혹시 채식주의자셨나? 내가 모르는 사이에 채식주의자가 되신 건가? 별별 생각이 다 드는 동안 작가님은 샐러드집 얘기를 꺼냈다. 의심은 확신이 되어갔다. 그간 채식주의자가 되신 거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시다, 채식!
그렇게 식당으로 향하려는 찰나, 작가님이 내게 말했다.
“혹시 식사하는 거 부담스러우시면 카페가도 돼요. 식사 어려워하신다고, 글 읽어서요.”
그랬다. 작가님은 내가 모르는 사이 채식주의자가 되신 게 아니었다. 내가 식이장애를 겪었다는 글을 보셨고, 부담스럽지 않은 음식을 찾다가 채식을 말한 거였다. 미스터리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나는 처음 받아보는 배려에 어쩔 줄 몰라하며 조심스럽게 속마음을 말했다.
“사실..., 식사하는 거 지금도 어려워서요. 카페가 좋을 거 같아요. 좋은 카페는 잘 알고 있거든요.”
“좋아요. 카페나 갑시다!”
그렇게 몇 년 만에 만난 모 작가님과는 식사 한 번 하지 않고 바로 카페를 향해갔다. 식당은 점심 손님으로 몰리는 시간이었음에도. 작가님은 요즘 위가 좋지 않다며 차를 마셨고 아직 젊은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음식은 오가지 않았지만,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음식이 없어도 마음이 오가는 순간이었다.
작가님과 실컷 수다를 떨고 헤어지는 길. 작가님이 말했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살아있다면, 언젠가요?”
“그럼 살아있어야겠네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따스한 말까지. 이런 완벽한 사람 같으니라고. 나는 배려라는 선물을 잔뜩 껴안고 말했다.
“다음에 또 봬요.”
간단히 악수를 나누고 멀어지는 길. 배려로도 마음이 꽉 찼는데 용기까지 얻었다. 솔직하게 먹고 싶지 않다고 말해도 괜찮다. 꼭 식사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식사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마음을 나눌 수 있다. 그 뒤 그분의 책을 읽었다.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 한 소식인이 다른 소식인에게 용기를 줬다.
작가소개 : 이수연
남들보다 '덜' 먹는 사람.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더 먹어"였다. 성인이 되어 우울증과 함께 공황장애, 식이장애를 앓았으며 정신병원에 입원해서도 "더 드세요"를 가장 많이 들었다. 지금은 식이장애를 극복하고 건강한 식생활을 위해 소식좌로 살아가고 있다. <조금 우울하지만, 보통 사람입니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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