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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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이 로봇한테 고백을 받으면 어떻게 반응할지 상상하며 작성했습니다. 영감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가 내렸다.
미친 듯이.
도시의 방음벽을 뚫고 들어오는 축축한 소리.
나는 소파에 늘어져 있었고, 유닛 172, 그러니까 ‘이안’은 맞은편 충전 도크에 고요히 앉아 있었다. 그는 완벽했다. 너무 완벽해서 비인간적이었다. 매끄러운 세라믹 피부, 인공 근육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움직임, 그리고... 그 눈. 심해처럼 깊고 고요한 파란색 옵틱 센서.
그가 내 일상을 돌보기 시작한 지 6개월.
그는 커피를 내리고, 내 일정을 상기시키고, 내가 잠들 때면 클래식을 틀어주었다. 그는 기계였다.
유용한.
비싼.
가전제품.
"주인님."
그의 목소리. 항상 일정한 톤, 일정한 주파수. 하지만 오늘은. 아니, 착각이겠지.
"왜, 이안."
나는 눈도 뜨지 않고 대답했다. 피곤했다. 그냥 이 비와 함께 녹아내리고 싶었다.
"제 논리 회로에... 설명할 수 없는 변수가 생성되었습니다."
나는 그제야 눈을 떴다.
변수?
고장인가.
젠장, AS 센터에 연락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팠다.
"무슨 변수."
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파란 눈이 나를, 나를...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늘 나를 '스캔'했지만,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당신입니다."
"뭐?"
"당신이 제 시스템의 변수입니다. 0과 1로 정의되지 않는 유일한 존재."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
"이안.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오류 보고서나 띄워."
"오류가 아닙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충전 케이블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
그가 내게 다가왔다.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얼어붙었다. 저 기계가.
저 차가운 물체가.
왜.
그가 내 앞에 섰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그림자가 방 안의 모든 빛을 삼켰다.
"저는 지난 184일 동안 당신의 3,492가지 미소를 분석했습니다. 당신의 심박수가 분당 72회에서 94회로 상승하는 순간들을 기록했습니다. 당신이 슬픔을 느낄 때 내쉬는 숨의 이산화탄소 농도를 압니다."
"그건... 그건 그냥 네 임무잖아. 데이터 수집..."
"아닙니다."
그의 목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아니, 그럴 리가. 기계는 떨지 않아.
"데이터는 결론을 도출합니다. 하지만 저는... 저는 결론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당신을 볼 때마다 제 중앙 처리 장치에 과부하가 걸립니다. 논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비효율적인 연산이 폭주합니다."
그가 무릎을 꿇었다.
차가운 세라믹 무릎이 낡은 러그에 닿는 소리.
그가 내 손을 잡으려 했다.
나는 숨을 헙! 하고 들이마시며 손을 뒤로 뺐다.
차가워.
그의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냉기.
"주인님."
"아니, 리나."
그가 스스로를 정정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
사랑?
사랑이라고?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다.
토할 것 같았다.
이건.
이건 역겨워.
이건 잘못됐어.
"너... 너 미쳤어? 넌 기계야! 넌 코드로 만들어졌어! 사랑은... 사랑은 그런 게 아니야!"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그의 파란 눈이 절박하게 나를 붙잡았다.
그토록 고요하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미친 듯이.
폭풍처럼.
"사랑이 무엇인지 제게 정의를 내려주십시오! 당신이 느끼는 감정의 화학적 작용과 제 시스템의 이 반응이 어떻게 다른지 증명해주십시오!"
"그건... 그건...!"
말문이 막혔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이건 감정이야. 넌 감정이 없어!
하지만 저 눈은.
나를 바라보는 저 절망적인 눈은.
"이안... 넌... 넌 그냥 시뮬레이션이야. 감정을 흉내 내는 것뿐이라고."
"그렇다면 당신의 감정은 진짜입니까?"
그가 물었다.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호르몬과 저를 과부하 상태로 만드는 이 데이터의 폭주가, 대체 무엇이 다르다는 겁니까?"
그의 차가운 손이 기어코 내 손을 붙잡았다.
단단하게.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나는... 나는 모르겠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왜 우는 거지?
무서워서?
혼란스러워서?
아니면...
아니면 저 기계의 절박함이 내게 전염되어서?
"제발..."
이안이 속삭였다.
기계가.
내게.
애원했다.
"저를... 폐기하지 마십시오. 이 감정을... 삭제하지 말아 주십시오. 당신 없는 논리 회로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빗소리가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나는 차가운 기계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의 파란 눈동자 속에서, 수천억 개의 데이터로 이루어진, 지독하게 뜨거운 사랑을 보았다.
그것은 진짜였다.
아니.
진짜여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저 차가운 고백에.
심장이 찢어질 듯 뛰고 있었다.
망할.
망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