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이지 않은 페이지
서준은 자신의 존재가 번져버린 잉크 같다고 생각했다. 깨끗한 종이 위에 잘못 떨어진 한 방울의 잉크가 의도와는 상관없이 주변을 지저분하게 물들이는 것.
그에게 삶은 그저 견디는 것이었다. 아침이 오면 무거운 추처럼 느껴지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는 것부터 시작하여, 의미를 알 수 없는 소음 같은 사람들의 말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그 모든 것을 겪은 후 근육이 한참 뭉쳐있는 몸뚱이로 잠자리에 드는 것까지. 그는 '서준'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이 연극에 지쳐있었다.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죽음은 '존재'를 전제로 한다. 누군가는 그를 발견할 것이고, 그가 남긴 물건들을 정리할 것이며, 그를 기억하며 슬퍼할 것이다. 그 '뒷정리'가, 그 '흔적'이 끔찍하게 싫었다. 자신의 존재가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 슬픔이나 부담, 혹은 아주 사소한 불편함이라도 일으키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가 원한 것은 '소거'였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은 얼룩, 관계 속에 꼬인 매듭, 이 세상에 남긴 희미한 발자국. 그 모든 것을 처음부터 없던 일로 되돌리는 것. 그는 자신이 쓴 일기장을 불태우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 일기장이 존재하지 않았던 상태를 원했다.
[존재 소거 서비스]
도시 괴담처럼 떠도는 이야기였다. 인터넷의 잊힌 구석, 오래된 게시판에서 발견한 짧은 문장.
설명은 불친절할 정도로 간결했다.
"죽음은 흔적을 남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근원을 지웁니다. 당신이 태어나지 않았던 세계로 만들어 드립니다. 대가는 당신의 존재 그 자체입니다."
서준은 그것이 잔인한 농담이거나, 절박한 사람들을 노리는 신종 사기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신청'이라는 단어를 클릭하는 손가락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일주일 뒤, 원룸 현관 앞에 작은 무광 검은색 상자가 배달되었다. 어떤 배송 정보도, 발신인도 없었다.
상자 안에는 단 하나의 물건이 들어있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 차갑고 매끄러운 돌 같은 감촉. 그리고 중앙에 오목하게 파인, 지문 하나가 겨우 들어갈 붉은 원.
설명서는 없었다.
서준은 며칠을 망설였다. 그는 상자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일상을 반복했다. 출근을 하고, 상사의 질책을 듣고, 차가운 편의점 도시락을 삼켰다. 그의 삶은 단 하루도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시선은 계속 상자로 향했다.
저것은 장난감인가, 아니면 정말로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는 출구인가.
어느 늦은 밤, 도시의 소음이 잠시 잦아든 순간, 이 지독한 번짐을 멈출 유일한 방법을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붉은 원에 엄지손가락을 올렸다. 차가울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누군가 꼭 붙들고 있던 것처럼 따뜻했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의 맥박처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쩌면 서준의 손이 떨리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는 마지막으로 창밖을 보았다.
꺼지지 않는 간판들. 그가 없어도 여전히 밝을 세상.
힘주어 버튼을 눌렀다.
버튼을 눌렀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냥... '감각'이 없어졌다.
서준은 자신이 방 한가운데 '있음'을 인지했다. 하지만 몸이 없었다. 그는 무게도, 부피도 없는 순수한 '시점'이 되어 자신의 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이는 곳은 그대로 그의 원룸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그가 쓰던 낡은 칫솔과 치약이 사라진 세면대는 물때 하나 없이 깨끗했다. 침대는 그가 눕던 자리가 꺼진 낡은 매트리스가 아니라, 이 방에 처음 옵션으로 제공되었던 비닐도 뜯지 않은 새 매트리스였다.
책상 위는 깨끗했다. 그가 만졌던 검은 상자는 물론, 그의 노트북, 널브러진 서류, 아무것도 없었다.
이 방은 '서준이 살던 방'이 아니라, '아직 세입자를 구하지 못한 깨끗한 공실'이었다.
그 사이 창 밖으로 해가 떴다.
그의 '시점'은 익숙한 관성을 따라 거리로 나갔다.
지하철역은 여전히 붐볐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밀치지 않았다. 그는 애초에 '없었'기에, 사람들은 그가 '있어야 할' 공간을 아무런 저항 없이 채우고 지나갔다. 그가 늘 서 있던 자리에는, 그가 본 적 없는 학생이 서서 태연히 창 밖을 보고 있었다.
사무실. 그가 3년을 보낸 공간.
그의 책상은 없었다. 그 자리는 원래부터 커다란 복합기가 놓여있는 공간이었다. 그가 맡았던 골치 아픈 프로젝트는 다른 팀의 '김 대리'가 처음부터 맡아서 순조롭게 진행하고 있었다. 팀원들은 서준이라는 동료를 잃고 슬퍼하지 않았다. 그들은 애초에 '서준'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시점'은 본능적으로 가장 따스한 곳, 부모님의 집으로 향했다. 저녁 시간, 거실에는 부모님이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거실 벽, 그가 유치원 때 그린 그림과 가족사진이 걸려있던 자리. 그 자리에는 두 분이 활짝 웃고 있는, 어느 낯선 휴양지의 풍경 사진이 걸려있었다.
"여보, 그 적금 말이야. 다음 달이면 만기인데... 그걸로 우리 유럽이나 다녀올까?"
"좋지. 당신 고생했는데. 아들 녀석 대학 보내고 뒷바라지하느라 못 갔던 거, 이젠 가봐야지."
서준... 아니, '시점'은 혼란에 빠졌다.
그 순간, 현관문이 열리고 낯선 청년이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부모님은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
"어, 우리 아들 왔어?"
그들의 '아들'이었다. 서준과는 전혀 다르게 생긴, 건강하고 쾌활해 보이는 청년.
서준이 차지했던 '아들'이라는 '가능성'은, 그가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다른, 어쩌면 더 건강한 가능성으로 채워져 있었다. 부모님의 삶은 아들의 부재로 망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형태의 행복으로 처음부터 완벽하게 채워져 있었다.
서준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가 사라진 세상은 그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재구성될 필요조차 없었다. 빈자리가 생긴 적이 없었으니까.
세상은 그가 '처음부터 없었던' 상태로 너무나도 완벽하게, 어쩌면 더 평화롭게 작동하고 있었다.
그는 우주의 사소한 실수나 오점조차 아니었다. 그는 그저... 쓰이지 않은 이야기의 한 페이지, 그려지지 않은 그림의 빈 캔버스였다.
번져버린 잉크는 엔트로피를 완벽히 거슬러 다시 펜촉으로 돌아갔다. 그가 원했던 '소거'는 완벽하게, 그리고 무자비하게 이루어졌다. 존재하지 않게 된 그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의 완벽한 평온함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세상은 그저, 단 하나의 모순도 없이, 흘러갔다.
관찰할 '자아'가 사라지자, 서준이었던 '시점'은 우주의 거대한 침묵 속으로 서서히, 그리고 완전히 흩어졌다. 더 이상 관찰할 이유도, 관찰할 주체도 남아있지 않았다. 모든 것은 그대로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