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단편 - 직립 보행을 팝니다. 리스로

직립 보행을 팝니다. 리스로

by ToB

인류가 두 발로 서는 법을 잊는 데는 하루면 충분했다. 어느 날 아침, 지구가 멋대로 지자기 축을 비틀어버렸기 때문이다.


나침반의 오작동이나 철새들의 추락은 전조에 불과했다. 재앙은 인류의 두개골 안쪽에서 시작됐다. 퇴화한 줄 알았던 뇌 속 자기 수용체(Magnetoreceptor)들이 뒤틀린 자기장에 과민 반응을 일으켰다. 전정기관은 위와 아래를 구분하는 기준점, 즉 '중력 벡터'를 상실했다.


멀쩡하던 아스팔트가 해일처럼 솟구치고, 하늘이 발 밑으로 곤두박질치는 감각의 교란. 현기증의 시대는 그렇게 도래했다.


인간은 다시 네 발 짐승처럼 바닥을 기어야 했다. 자본주의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기 전까지는.


'자이로-소울(Gyro-Soul)'.


척추에 이식해 뇌의 균형 감각을 강제로 보정하는 초소형 자기장 제어기. 칩이 활성화되면 뇌는 거짓말처럼 수평을 되찾는다. 인간은 직립하고, 존엄은 회복된다. 단, 당신이 매달 갱신되는 구독료를 감당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K는 엘리베이터 거울을 응시했다. 수직으로 곧게 뻗은 척추, 흐트러짐 없는 넥타이가 보였다.


경추 3번 부근에 심어진 '자이로-소울 프로' 모델은 월 250만 크레딧짜리다. 자기 폭풍이 몰아칠 때마다 사용자를 취객처럼 비틀거리게 만드는 보급형과 달리, 프로 모델은 태풍 속에서도 부동의 자세를 보장한다.


물론 K의 소유는 아니다. 회사에서 지급한, 언제 회수될지 모르는 임대 장비일 뿐.


K의 직함은 '임피던스 관리 팀장'. 실상은 연체자들의 균형을 압류하러 다니는 '직립 회수원'이다.


연회장은 도시의 최상층 스카이라운지였다.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도시는 빛나는 마천루의 숲이었으나, 그 발치에는 구독료를 감당하지 못한 하층민들이 개미 떼처럼 득실거릴 터였다. 하지만 이곳의 공기는 다르다. 참석자들은 우아했고, 꼿꼿했으며, 무엇보다 비쌌다.


K는 샴페인 잔을 든 채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의 귀 뒤편에서 자이로-소울의 상태 표시등이 반딧불이처럼 푸르게 명멸했다. 저 작은 불빛 하나가 인간의 품위를 지탱하고 있었다.


"결국 인간의 위대함은 시선에 있지 않겠습니까?"


창가 쪽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백발이 성성한 노신사가 좌중을 휘어잡고 있었다. 저명한 예술 비평가 M이었다.


"네 발로 기는 짐승은 땅만 봅니다. 오직 직립한 인간만이 별을 우러르지요. 고개를 세우는 태도, 그 불굴의 의지가 문명을 만든 겁니다."


주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조차, 자이로 센서의 정밀한 연산 아래 통제된 기계적인 우아함이었다.


K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얇은 태블릿을 꺼냈다. 화면 위로 M의 신상 정보와 함께 붉은 경고 문구가 점멸했다.


[리스 계약 만료: 48시간 초과. 결제 실패.]


M은 잔고 관리보다 자신의 고상한 철학이 더 중요했던 모양이다. 혹은, '설마 내가' 하는 특권층 특유의 안일함이 인출 실패 문자를 무시하게 만들었거나.


"실례합니다."


K가 다가가자 M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K의 저렴한 양복 깃을 훑고 지나갔다.


"누구시죠? 강연 중인데."


"옴니-밸런스 사(社)에서 나왔습니다. 직립 권한에 대한 채무 불이행 건으로 방문했습니다."


파티장의 소음이 뚝 끊겼다. 얼음 부딪치는 소리조차 멈췄다. M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착오가 있었나 본데, 내가 누군지 알아? 내일 비서가 처리할 거야. 재수 없게 어디서..."


"약관 14조 2항. 자발적 반납 거부 시, 현장에서 강제 회수 조치합니다."


K는 그를 무시하고 약관을 낭독했다. M이 삿대질을 하려 팔을 뻗었다.


"이 천박한 하수인 놈이 감히...!"


K는 망설임 없이 태블릿의 '회수' 버튼을 눌렀다.


M의 귓가에서 푸른 불빛이 툭 꺼졌다.


"어...?"


M의 고개가 기괴한 각도로 꺾였다. 뇌에서 수평선이 지워지자, M의 감각 기관은 바닥이 90도로 솟구쳤다고 비명을 질러댔다. 그는 허공을 허우적거렸다.


"으악! 땅이... 땅이 뒤집힌다!"


쨍그랑.


M이 들고 있던 와인잔이 산산조각 났고, 그는 턱시도를 입은 채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살기 위해 무언가를 잡으려 했으나, 잡으면 잡을수록 세상은 팽이처럼 더 빠르게 돌았다.


방금 전까지 별을 논하던 고매한 비평가는, 이제 침을 질질 흘리며 대리석 바닥을 영법하듯 기어 다니는 절지동물 꼴이 되었다. 속이 뒤집힌 그가 위액을 쏟아냈다.


"더러워!"


"저거 치워! 경비원!"


주변의 신사 숙녀들이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들의 뒷걸음질은 자로 잰 듯 완벽한 수직을 유지해 더욱 기이했다. 바닥에 엎어진 M은 K의 구두 발목을 움켜쥐었다.


"살려줘... 제발... 끄으윽... 토할 것 같아..."


K는 무표정하게 발목을 털어냈다. M의 손이 힘없이 미끄러졌다.


"고객님, 바닥은 돌지 않습니다. 고객님의 뇌가 돌고 있을 뿐이죠."


K는 태블릿에 서명을 남겼다. 처리 시간 3분. 군더더기 없는 업무였다. 경비 로봇들이 다가와 M을 짐짝처럼 들어 올렸다. M은 네 발을 허공에 휘적이며 끌려나갔다. 파티장은 잠시 술렁거렸으나, 클래식 선율이 다시 흐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우아한 대화가 이어졌다. 타인의 추락만큼 맛있는 안주는 없었다.


K는 화장실로 향했다. 손을 씻고 싶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메말라 있었다. 죄책감? 그런 건 사치다. 세상은 원래 기울어져 있고, 돈을 낸 자만이 똑바로 설 자격을 얻는다. 이 시대의 물리 법칙이다.


그때였다.


개인 단말기가 진동했다. 화면을 켜자 문자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발신: 옴니-밸런스 인사팀]

[귀하의 고용 계약이 '구조조정' 및 '자동화 대체'로 인해 금일 18:00부로 해지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사내 복지 혜택인 '자이로-소울 프로'의 라이선스 또한 즉시 만료됩니다.]


K는 시간을 확인했다.


18시 00분 03초.


"잠...깐."


입을 떼기도 전이었다. 세면대가 K를 향해 맹렬하게 쇄도했다. 아니, K가 세면대로 곤두박질쳤다.


쿵!


이마가 도기에 강하게 부딪혔다.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다.


M이 겪었을 지옥. 세상이 믹서기 속처럼 미친 듯이 회전했다. 위와 아래의 경계가 지워졌다. 천장의 형광등이 발밑에 박혔고, 바닥의 타일이 뺨을 후려쳤다.


"으윽..."


K는 비틀거리며 벽을 더듬었다. 하지만 손에 잡히는 건 미끄러운 타일뿐이었다. 다리에 힘을 주어 버티려 했으나, 뇌가 보내는 신호는 뒤죽박죽이었다. 오른쪽 다리를 뻗으면 몸은 왼쪽으로 쏠렸고, 허리를 세우려 하면 뒤통수가 바닥에 꽂혔다.


그는 화장실 바닥을 뒹굴었다. 조금 전 씻어낸 물기와, 누군가 흘리고 간 소변 자국이 셔츠에 스며들었다.


지독한 현기증. 속이 메스꺼웠다. K는 변기를 부여잡고 헛구역질을 했다.


'이건 착오야. 내가 누군데. 내가 몇 명을 회수했는데.'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더듬어 단말기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손끝에 닿는 건 차가운 타일의 이음새뿐이었다.


그때, 화장실 문이 열리고 파티장의 소음이 쏟아져 들어왔다.


"어머, 여기 사람이 쓰러져 있어요!"


"술에 취했나? 아니, 저거..."


누군가 K의 귀 뒤를 가리켰다. 자이로-소울의 불빛이 꺼져 있었다. 검게 죽은 LED는 이 사회에서의 사망 선고나 다름없었다.


"리스가 끊겼군."


"쯧쯧, 여기서 이러지 말고 나가서 뒹굴지. 냄새나게."


시선. 그 꼿꼿하고 오만한 시선들이 K의 정수리에 꽂혔다. 그들은 정확히 90도로 서서, 바닥에 널브러진 K를 원숭이처럼 구경했다.


K는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일어나야 한다. 일어나서 저들의 콧대를 꺾어야 한다. 나는 너희와 달라. 나는 집행관이었어.


그는 이를 악물고 네 발로 바닥을 짚었다. 있는 힘껏 상체를 일으켰다.


일어나려는 순간, 세상이 다시 한번 180도로 회전하며 그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뺨이 타일 바닥에 짓이겨졌다. 입 안에서 비릿한 쇠맛이 났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타일 바닥의 미세한 흠집, 굴러다니는 먼지 뭉치.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구두 굽. 반짝이는 에나멜 구두, 날렵한 하이힐.


그런데 기묘했다.


바닥에 온몸을 완전히 밀착하고, 일어나기를 포기하고 늘어진 그 순간에, 미친 듯이 돌던 세상이 멈췄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세상은 여전히 돌고 있었지만, 그가 뺨을 대고 있는 이 '바닥'만큼은 절대적으로 그를 떠받치고 있었다.


'... 안정적이다.'


기계가 만들어준, 붕 뜬 듯 위태로운 평온함이 아니라 뼈와 살이 지구의 표면에 닿아 만들어내는 원초적인 안도감.


평생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납작 엎드린 자에게는 더 이상 추락이 없다.


K는 실눈을 뜨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를 내려다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 존재들은 더 이상 위엄 있어 보이지 않았다.


위태로웠다. 귓가에 붙은 작은 칩 하나가 고장 나면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불안하게 세워진 막대기들이었다.


그들의 꼿꼿함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매달 돈을 내고 균형을 빌려 쓰는 채무자들에 불과했다. 언제든 저 칩이 꺼지면, 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것이다. 그리고 그 추락의 공포를 잊기 위해 필사적으로 서로의 눈치를 보며 샴페인을 마시고 있었다.


저들은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구원을 유예받았을 뿐이다.


K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올라갔다. 피 섞인 웃음이 픽, 하고 터져 나왔다.


"크윽, 큭, 하하하하..."


바닥에 처박힌 남자가 미친 듯이 웃자, 구경하던 사람들이 혐오스럽다는 듯 물러났다.


"미쳤나 봐."


"가자, 기분 나빠."


멀어지는 구두 소리가 불안하게 울렸다.


K는 차가운 타일 바닥에 뺨을 비볐다. 더럽고, 차갑고, 딱딱했다. 하지만 이것은 진짜였다.


이 현기증, 이 구토감, 그리고 이 바닥의 서늘한 감촉. 이것만이 온전히 K가 소유한 유일한 현실이었다.


그는 더 이상 억지로 일어나려 애쓰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아주 천천히 팔을 뻗어 바닥을 기었다. 마치 대지를 처음 만난 태초의 생명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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