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이랑 Dec 15. 2018

<동화로 떠나는 내면 여행 2탄-한국&일본 동화읽기➂>

우리도 애도의 공간을 찾을 수 있을까 

『우연한 빵집』(김혜연, 비룡소, 2018)



1. 나만 그런 게 아니다


 물론 나만 그런 게 아니란 걸 알고 있다.

 그런데도 어떤 때 보면 나만 아프고, 나만 힘들고, 나만 괴로운 것 같은 때가 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아무 일 없이 무탈하게 잘 살고 있는데 나만 왜 이런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모든 운 나쁘고, 불행한 일들이 그냥 나만 졸졸 따라다니며 나한테만 일어나는 것 같아 감당하기 힘든 순간들이 있고, 그러한 시간이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아 막막하고, 죽을 것 같은 때가 있다. 


 하지만 힘들고 괴롭고 슬픈 순간이 나한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만 괴롭고 슬픈 것이 아닌 모두가 괴롭고 슬플 때가 있다.

 『우연한 빵집』(김혜연, 비룡소, 2018)에는 남쪽 바다로 떠나는 배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친구와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2. 작은 빵집을 알아보다


 청천벽력과 같은 사고로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친구와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찾아드는 곳이 있다. 이기호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빵집이다. 『우연한 빵집』은 이 빵집에 대한 묘사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느 한적한 동네 주택가 뒷골목에 빵집이 하나 있다. 눈에 띄는 간판도, 가게 이름도 없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인 자그마한 빵집이다.(『우연한 빵집』, p7)    


 『우연한 빵집』은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사거리나 큰 길가에 있는 넓고 유명한 빵집이 아니다. 가게 이름마저 변변하지 않는 데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인 자그마한 빵집”이다. 

 하지만 이 작고 이름도 없는 빵집을 하경이라는 여학생은 발견한다.

   

그 빵집을 발견한 건 정말 우연이었다. (…) 주택가가 시작되는 곳에서 낯익은 가게를 발견했다. 처음 온 동네인데 ‘낯익은’이라니.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 가게를 바라보았다. (…) 차양의 ‘빵’이라는 글자와 작은 식빵 그림이 간판을 대신하고 있었다. 캉파뉴의 블로그에서 본 가게. ‘빵’이 분명했다.(『우연한 빵집』, p10-11)   

 

 간판 대신에 차양에 ‘빵’이라고만 적혀 있는 이 빵집을 하경이는 ‘캉파뉴’라고 하는 닉네임을 가진 사람이 운영하는 블로그를 통해 알고 있다가, 우연히 지나친 길가에서 알아본다.      


3. 지금 우리들한테 필요한 공간, ‘우연한 빵집’


 『우연한 빵집』에는 불의의 사고로 친구를 잃고, 오빠를 잃고, 자식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그들 남겨진 사람들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아니면 스스로가 찾아 나선 듯 그렇게 ‘우연한 빵집’으로 찾아든다.


 하경이는 오빠를 잃었다.

 오빠의 죽음은 하경이의 가족들에게 깊은 상처로 남고, 하경이는 오빠를 죽음으로 몰고 간 아빠를 원망하며, 가족에 대한, 자신의 집에 대한 마음의 문을 닫게 된다. 그러한 하경이에게 ‘우연한 빵집’은 치유와 애도의 공간이 된다.    


반죽 덩어리는 목욕이라도 한 것처럼 더 뽀얗고 동글동글하게 부풀어 있었다. 새근새근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너무 사랑스러웠다. 밀가루 덩어리에 불과했던 것이 생명을 가진 존재처럼 보였다. 가슴이 뭉클했다. 

느닷없이 하경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사장님, 저 빵 만드는 거 배우고 싶어졌어요.”

말을 하고 나서 하경 자신도 놀랐다.(『우연한 빵집』, p89)    


 어디 하경이 뿐이랴, 『우연한 빵집』에는 이은주라고 하는 여성이 나온다.

 이은주는 딸을 잃었다. 남도로 떠나는 뱃길에서 열일곱의 나이로 불의의 죽음을 맞이한 딸. 딸을 잃고 이은주는 아파한다. 딸은 유독 빵을 좋아했고, 그런 딸에 이끌리듯 딸을 임신했을 때 우연히 딱 한 번 가본 빵집을 다시 찾아간다.  

   

“저……혹시 빵 만드는 거 어렵나요?”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 순간 언젠가 딸이 직접 만들었다며 입에 넣어 준 빵을 떠올렸던가 보다. (…) 

“사, 사실 빵을 좋아하진 않아요. 그런데 여기서 보고 있으니까 나도 한번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이 말은 진심이었다. 가게 안의 따뜻한 공기와 편안하고 부드러운 분위기 때문인지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우연한 빵집』, p138-139)    


 ‘우연한 빵집’은 하루아침에 오빠와 딸을 잃고 발 디딜 곳을 잃어버린 하경이와 이은주가 찾아낸 애도의 공간이며, 다시 살아나 앞으로 한 발 나아가게 하는 소생의 공간이다.   

  

4. 나한테 그러한 공간은 어디인가


 그렇다면 나한테 이러한 공간은 어디인가. 

 내가 무슨 일에 상처 입고, 상실을 겪고, 예기치 못한 큰 아픔을 겪었을 때 내 발걸음은 고향집으로 향했었다. 내게 엄마가 있는 고향집이란 공간은 어느 의미에서는 ‘우연한 빵집’ 역할을 해주었다. 하지만 나한테 나의 고향집은 어디까지나 피난처이고 피신처이며 은닉처였다. 지극히 소극적이고, 그저 기대기만 하고, 퇴행하고, 안주하는 공간이었다.


 나는 하경이나 이은주처럼 크나큰 아픔과 상실을 겪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하경이나 이은주는 자신들의 힘으로  ‘우연한 빵집’을 알아보고, 찾아내고, 우리들 육신에 필요한 양식인 ‘빵’을 만들고자 한다. 다시 살아가고자 한다. 나는 그 누구인가에게 그러한 공간이 되어 본 적이 있던가. 나는 고향집이라는 엄마의 공간으로 당연하다는 듯이 기어들어가 맹목적으로 기대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나의 엄마는 어떠한가. 엄마는 젊은 시절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다. 둘째 오빠였다. 둘째 오빠가 죽었을 때 난 예닐곱 살도 채 안된 아이었다. 하지만 오빠가 죽고 돌아오지 않던 날의 마을 분위기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엄마의 처절한 슬픔을 기억하고 있다. 엄마는 아들을 잃고 석 달간 말을 못 했다.


 우리 집에서 죽은 둘째 오빠의 이야기는 금기였다. 어느 날 나는 엄마와 아빠에게 둘째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둘째 오빠의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나의 부모는 굳게 입을 다물고, 얼굴이 굳어지며, 동시에 창밖을 향해 몸을 돌려 앉았다. 나는 온몸으로 거부하는 부모의 모습을 목격하고 말았다. 나는 돌부처가 되는 부모의 내면 속에 자식을 잃은 엄청난 상처가 생생하게 똬리 틀고 살아 있음을 알았다. 


 그래도 나한테는 이렇게 많은 상처를 안고 있는 우리 부모의 집이 ‘우연한 빵집’이 되어주었던 시기가 분명히 존재했다. 그렇다면, 우리 부모에게는 그 어느 곳이 ‘우연한 빵집’이 되어줄 수 있단 말인가. 작은 아들에 대한 상처를 가슴에 담고 애도하지 못 한 채 지금에 이른 나의 부모가 불쌍하다.      


5. 자식을 잃은 이들의 슬픔을 그 무엇에 비교할까


 바버라 파흘 에버하르트가 쓴 『애도 어떻게 견뎌야 할까』(신유진 옮김, 율리시즈, 2015)는 어느 날 갑자기 남편과 어린 두 아이를 교통사고로 떠나보낸 저자의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기록하고 있다. 홀로 남겨진 바버라는 아이들과 남편을 생각하며, 끊임없이 “왜 우리 아이들인가”, “왜 우리 남편인가”를 되뇐다.   

  

가족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이를 잃은 수많은 엄마들에게서 위로가 담긴 메일을 받았다. 나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내 아픔은 그들과 비교할 수 없다고 느꼈다. 나는 아픔을 무슨 트로피처럼 간직했다. 그 아픔은 너무도 소중한, 나만의 특별한 것이라 여겼으며 그 무엇과도 연관 짓기 싫었다. 당시의 나는 아직 공동체의 위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애도 어떻게 견뎌야 할까』, p73-74)


 자식을 잃은 엄마의 슬픔을 그 무엇에 비할까. 『우연한 빵집』에서 하경이는 자신이 처음 만든 빵을 챙겨 집으로 향한다.

   

버스에서 내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찬바람이 달려들어 온몸을 휘감았다. (…) 고개를 푹 숙이고 최대한 몸을 움츠려 걷는데 그림자 하나가 앞에 나타났다. 고개를 들었다. 엄마였다.

“요새 뭐하고 다니는 거니?”

추궁하거나 캐묻는 말투는 아니었다. 걱정이 되는 거겠지.

하경은 대답 대신 들고 있던 봉투를 내밀었다.

“뭐야?”

“빵. 단팥빵.” (…)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봉투에서 빵을 하나 꺼내 비닐 포장지를 벗겼다. 집까지 가는 동안 엄마는 조용히 빵을 먹고, 하경은 그 소리를 들었다.

가로등 아래를 지날 때 오물오물 빵을 먹는 엄마 얼굴이 불빛에 드러났다. 지난 이 년간 십 년은 더 나이 들어 버린 얼굴. (…)

집에 도착했다. (…)

“그런데 엄마.”

엄마가 돌아보았다.

“아빠도 좋아할까, 단팥빵?” (『우연한 빵집』, p159-160)    


 『우연한 빵집』에는 오빠를 잃은 하경이의 방황과 아픔과 슬픔과 애도는 그려지지만 하경이의 엄마와 아빠의 모습은 많이 그려지지 않는다. 그들의 슬픔의 깊이가 너무나 깊어 미처 그리지 못할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하경이는 자기가 만든 빵을 엄마에게 내밀었고, 엄마는 그 빵을 먹었고, 그리고 하경이는 아빠에게도 그 빵을 건넬 생각이다. 


 이렇게 하경이네 집에는 하경이가 있다.

 하경이가 있는 바로 이곳이 하경이의 엄마와 아빠에게도 애도의 공간이 되길 바랄 뿐이다.          


6. 집단적 애도가 필요한 시간    


 『우연한 빵집』에는 하경이와 하경이의 엄마, 이은주와 자신의 딸을 좋아했던 친구들, 역시 사랑하는 친구를 잃은 이기호와 연인을 잃은 소연 등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고 아파하고 슬퍼하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조용히 펼쳐진다.     


 『우연한 빵집』에서는 2014년 4월 16일에 발생한 세월호 참사를 전면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이은주의 딸은 남도로 떠나는 배에서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는 것으로 나온다.


 수많은 귀중한 생명을 순식간에 앗아간 세월호 침몰 사고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죽는 날까지 잊어서는 안 되는 참혹한 사건으로 기억된다. 이 사고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친구를 잃고, 지인을 잃은 사람들의 아픔에 비할 수는 없지만, 세월호 참사는 우리들 모두에게도 집단적인 아픔과 트라우마를 안겼다.


 융은 「무의식에의 접근」이란 글에서 전쟁의 상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집단 무의식의 세계로 작용하는지에 대해 언급한다.    


금세기 첫 10년간 목가적인 천진난만한 시절엔 그 극악함을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그 뒤에 발생하여 우리가 사는 세계를 뒤집어 놓았다. 그 이후로 세계는 정신분열증의 상태에 놓여 왔다. 문명국인 독일만이 정신분열증의 끔찍한 원시성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러시아 또한 그 증세에 의해 지배되었고, 아프리카는 불길에 싸였다. 서방 세계가 불안을 느끼게 된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무의식에의 접근」, 『인간과 무의식의 상징』, 이부영 옮김, 1983, p94)    


 우리에게도 집단적 애도가 필요한 시간이다.  


7. 나는 작은 빵집을 알아볼 수 있을까    


 융은 다른 저서 『카를 융 기억 꿈 사상』에서 현대가 안고 있는 위험성을 경고한다.    


인간 정신의 변이(變異)는 위험하다!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이 제대로 기능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있다. 만일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제정신을 잃어버리면 수소폭탄이 터질 수도 있다!

(카를 구스타프 융, A 야페 편집, 조성기 옮김, 김영사, 2007, p250)     


 지금 내 마음 상태는 어떤한가 보살필 때이다.

 어디 마음 뿐이랴. 이 세상에는 두 눈을 뜨고, 안경까지 쓰고, 렌즈까지 끼고 있어도 진정한 가치가 있고 소중한 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신데렐라」의 언니들 같이 새에게 두 눈을 쪼일지도 모를 존재가 한 둘이 아닌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적한 동네 주택가 뒷골목에 있는”, “이름도 없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인 자그마한 빵집”을 나는 과연 놓치지 않고 알아볼 수 있을까. 

 어찌보면 상처의 깊이만큼, 내면의 성찰만큼 그만큼 볼 수 있게 되는지도 모르리라.

 그런 의미에서 『우연한 빵집』에서의 하경이와 이은주는 강인하면서도 유연함을 지닌 여성들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나는 또 생각한다. 이기호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우연한 빵집’ 같은 공간 또한 실은 도처에 존재하고 있음을. 단지 내가 제대로 마음의 눈에 불을 밝히지 못 해 알아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그래도 도처에 ‘우연한 빵집’이 존재하고 있다는 지금 이 생각이 큰 위안이 된다. 


8. 우리 모두 하나의 작고 큰 애도의 공간이 되어    


 이우경의 저서 『아버지의 딸』을 보면 “애도란 다름 아닌 충분히 슬퍼하는 일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나왔어도 슬픔은 오래된 눈물로 가슴속에 고여 있다”(휴 출판사, 2015, p280)란 말이 나온다. 슬픔과 눈물로 가득 찬 가슴을 보살펴줄 공간이 필요하다.


 어쩌면 마음만 바뀌면 인간의 마음이라는 공간 또한 나를 위한 타인을 위한 애도의 공간이 될 수 있으리라. 내 마음 어느 한 켠에 타자를 위한 ‘우연한 빵집’ 공간을 두는 것은 결국 나를 위한, 나를 치유하기 위한, 나를 애도하기 위한 공간이 됨을 알게 된다. 


 『우연한 빵집』에서 보아온 것처럼 애도할 수 있는 공간은 아주 작아도 된다. 설령 이름이 없어도 된다. 그냥 그 자체로 존재해 주면 된다. 

 그 작은 하나하나의 공간이 이윽고 사람다운 세상을 만드는 큰 생명의 공간이 됨을 알기 때문이다.




이전 08화 <동화로 떠나는 내면 여행 2탄-한국&일본 동화읽기➁>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