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할 줄 아는 게 하나 있어서

어린이문학 연구가의 좌충우돌 생존기

by 강이랑

그래도 할 줄 아는 게 하나 있어서


가끔 진지하게 생각할 때가 있다. 그래도 할 줄 아는 게 하나 있어서 다행이라고.


고등학생이었을 때였다. 담임 선생님이 일본어 교과서를 나누어 주었다. 내일부터 이 교과서로 일본어 수업을 한다는 것이다.


밤, 나는 방 안에 홀로 엎드려 일본어 교과서를 펼쳤다.

교과서 면지였을까. 나는 생소한 일본어 글자를 골똘히 들여다본다. 특히 부드러운 곡선이 두드러지는 히라가나는 글자라기보다는 하나하나가 이미지로 들어와 나를 사로잡았다. 잠이 많은 나는 잠잘 생각을 잊고 밤새도록 히라가나를 종이에 따라 썼다.


다음날, 첫 일본어 시간이었다. 세상에 일본어 교과서를 깜박한 것이다. 키가 작은 나는 교실 맨 앞자리에 앉아 가만히 있어도 금세 선생님 눈에 띈다. 선생님은 어제 나눠준 책을 잊고 왔냐며 혼내신다. 내가 왜 일본어 교과서를 잊고 왔는지 몰라, 나 자신도 어안이 벙벙한 상황이라 나는 아무 할 말이 없다.


선생님이 초록색 칠판에 하얀색 분필로 히라가나를 하나하나 써주신다. 나는 그 글자들이 너무나 익숙하다. 하나하나 모두 다 알 것 같다. 선생님을 따라 한 번씩 읽고 나서 나는 혼자서 술술 히라가나를 읽는다. 선생님이 벌써 다 외웠냐며 아까 혼내신 것은 다 잊고 기특해하신다.


그렇게 나는 일본어 선생님께 인정을 받고, 어느새 일본어는 나의 최애 수업이 되었다. 이렇게 고등학교 때 만난 일본어라고 하는 언어를 그 후 꾸준히 연마하여 어느덧 일본어는 나의 세계를 확장시키고, 놀이가 되어 주었다. 나는 일본어로 쓰인 것이라면 소설, 영화, 드라마, 노래 등 그 무엇이든 읽고, 보았다.


대학에 들어가 문예창작을 공부한 나는 그 후 글짓기 학원에서 아이들을 지도하였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창작 그림책이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시점이었고, 많은 양질의 동화책이 출간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그림책과 동화책을 읽어주기 위해서 일터 가까이에 있는 동네 어린이 전문 서점을 들락날락하면서 나는 어린이문학의 매력에 빠졌다.


글짓기 학원에 근무한 지 어느덧 3년째가 되고 만으로 20대 후반으로 들어섰을 때 친구들이 한 명 두 명 결혼을 하고, 이도 저도 아닌 나는 무언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듯한 답답함 속에서 활로를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다.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고, 동화와 그림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일본어 공부에 매진하는 나날이었다. 앞길은 막막하기만 하였고, 희망이 보이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인사동에 있는 일본문화원 도서관에서 일본의 다양한 대학을 소개하고 있는 유학 관련 잡지를 보게 되었다. 당시 어린이문학에 관심이 있던 나는 일본 대학 중 아동문학과가 있는 학교를 찾아보았다. 오사카에 있는 어느 여자 대학에 아동문학과가 있었다.


그 학교 주소를 메모하여 집으로 돌아온 나는 학교에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몇 주가 지나 학교에서 답장이 왔다.


나는 학교에서 일러주는 대로 자격요건을 살피고, 서류를 준비하고, 미야자와 겐지 동화를 필사하며 아동문학에 대한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일본에 가면 당장 써야 할 회화 공부를 위해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과 당시 유행하던 일본 드라마 등을 보며 유학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같이 일본어 공부를 하던 동료분의 도움을 얻어 내가 일본으로 유학 가는데 있어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난관일 수 있었던 일본인 신원보증인도 소개를 받았다. 유학 준비를 마친 나는 오사카로 향했다. 외국은 처음이었다.


그래도 일본어를 할 줄 알아서 다행이었다. 할 줄 아는 게 그래도 하나는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할 줄 안 그 하나인 일본어가 나를 아동문학과가 있는 대학으로 보내고, 나는 어린이문학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놀이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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