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현관 앞 계단에 서서 한 손에는 갓난아기를 안고, 한 손에는 장바구니를 건네며 아들 스티븐에게 심부름을 시킨다. 현관문은 열려 있고, 아기가 젖병을 떨어뜨려도 엄마는 알아채지 못한다. 스티븐은 밖에서 놀고 있다가 엄마가 불러서 왔을까.
엄마가 스티븐에게 부탁한 내역은 이렇다.
“아기 먹을 달걀 여섯 개, 바나나 다섯 개, 사과 네 개, 오렌지 세 개 하고 네가 먹을 도넛 두 개랑 과자 한 봉지 사 오너라. 그리고 이 쪽지는 25호 집에 전해 주고.”
물품도 많고, 숫자도 하나하나 다르고 세세하기까지 하다. 무엇이 다섯 개였고, 무엇이 두 개였는지, 무슨무슨 과일이었는지, 아무 상관이 없는 내 머리가 벌써부터 뒤죽박죽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그림책의 주인공 스티븐은 “25호 집을 지나, 울타리 사이를 지나, 쓰레기통을 지나, 도로 공사하는 아저씨를 지나, 사나운 개가 사는 집을 지나” 가게에 도착한다. 물품 하나하나, 숫자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게 여기지는 상황에서 스티븐이 지난 곳들도 그냥 예사롭지가 않다.
스티븐은 무사히 엄마가 부탁한 심부름을 마치고, 집으로 귀환할 수 있을까?
그 세세한 물품들을 스티븐은 척척 구입하여 바구니에 담아 들고 이제 집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 이때 그림책은 스티븐이 장을 본 물품들을 다시 하나하나 세세하게 반복해준다. 무슨무슨 물품인지, 모두 몇 개인지. 글로도 말해주고 이미지로도 하나하나 다 그려준다. 모두 6개의 물품, 개수 총 21개이다.
하지만 가게에서 나오자마자 난관이 시작된다.
곰이 나타나 “달걀 내놔. 안 주면 숨도 못 쉬게 꽉 끌어안을 거야.”라고 위협한다. 하지만 스티븐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스티븐은 아주 침착하게 곰이 원하던 달걀을 사용해 위기를 모면한다.
그리고 다시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데 이번에는 “사나운 개가 사는 집”앞에서 원숭이가 나타나 ‘바나나’를 달라고 한다.
그러는 동안에도 달걀 하나가 사라진 이미지와 바나나 하나가 사라진 이미지가 계속 나오고, 스티븐 앞으로 장을 본 물품들을 노리는 동물들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그리고 사과 하나가 사라진 이미지, 오렌지 하나가 사라진 이미지 또한 계속 등장한다.
스티븐은 자신이 먹을 도넛 두 개 중에서 하나를 돼지에게 던져주고 맨 마지막에는 과자 한 봉지까지 사라진다.
드디어 집에 도착한다. 문 앞에서 엄마가 기다리고 있다. 엄마는 “스티븐, 대체 어디 있다 오는 거니? 겨우 달걀 여섯 개, 바나나 다섯 개, 사과 네 개, 오렌지 세 개, 도넛 두 개랑 과자 한 봉지 사 오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늦었어?”하고 말한다.
엄마는 자신이 아들에게 심부름시킨 물품과 숫자를 정확히 다시 되풀이한다. 하지만 아들이 장을 보고 집까지 돌아오는 길에 겪은 하나하나의 난관은 결코 알지 못한다.
장바구니는 이제 엄마 손으로 넘어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장바구니를 노리는 동물들에게 침착하게 대처했던 스티븐은 사리지고, 갈 길을 잃은 두 손을 내려뜨린 채 ‘멍’한 시선으로 엄마를 바라본다. 스티븐의 진짜 난관은 이제부터 시작된 것이다.
마지막 장면 이미지를 보면, 장바구니에 든 물품들이 하나씩 사라진 것처럼도 보이고 그대로 다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자세한 것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편지를 제외하고 엄마가 장 봐오라고 시킨 물품들은 모두 먹을 것이다. 가게에서 나오자마자 곧바로 동물이 등장하는데, 어쩌면 이 동물들 하나하나는 바나나를 먹고 싶고, 도넛을 먹고 싶은 스티븐의 내적 갈등을 묘사한 것인지도 모른다.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하나 물품들을 되뇌고 숫자까지 하나하나 읊는 엄마를 봐서는 어쩌면 스티븐은 내면으로만 욕망하고 그 마음을 꾹 참고 집까지 돌아왔을 수도 있다. 나라면, 그냥 몇 개는 먹는다. 한 개씩만 먹으면 다행이다. 어쩌면 길 오는 내내 절반은 먹어 치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스티븐은 장바구니를 들고 오는 내내 먹고 싶은 강렬한 마음을 억누르고 집에 도착한 것만 같다. 나는 앞서 “스티븐은 무사히 엄마가 부탁한 심부름을 마치고, 집으로 귀환할 수 있을까?”란 질문을 던졌는데, 표면적으로는 “그렇다”이다.
하지만 엄마는 스티븐의 그 내적 갈등, 그 내면의 욕망, 그 노력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스티븐 또한 알지 못한다. 바로 이때 자신의 욕망이 억압되어 무의식 속으로 들어간 것을.
어쩌면 이 그림책은 무의식 속에 들어간 자신의 억압을 다시 그림책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하나씩 하나씩 사라지는 물품 이미지를 보며 묘한 해소를 느끼는 나 같은 독자도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