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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Aug 04. 2021

식탁 위의 기쁨

결혼을 하고 나서 발견한 의외의 기쁨 중 하나는 '요리'다. 먼저 밝혀두자면, 자취 10년+유부 생활 5년 차에 접어들지만 나는 요리를 못한다. 매우. 내 기준의 요리는 비빔국수에 오이와 반숙 계란을 올리는 것, 감자와 삶은 계란을 으깨 만든 감자 샐러드를 보들보들한 빵 사이에 꽉꽉 채우는 것 정도를 의미한다.    


결혼 전, '행복은 식탁 위에 있다'는 말은 눈도 못 뜨고 출근해서 옷 갈아입으려고 퇴근하는 내게 먼먼 이야기였다. 한 끼를 위해 장을 보고, 재료를 다듬고, 설거지를 하는 시간이 제일 아깝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심지어 때 맞춰 식사를 하는 것조차 귀찮아서 식사를 대신하는 알약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신혼 효과였던 걸까. 서로를 위해 요리를 하고, 예쁜 그릇에 음식을 담고, 오늘은 뭘 먹을까 고민하는 일이 의외로 재미있었다.



우리는 칠엽수가 바람에 너울대는 부엌 창가의 양철 간이 식탁 앞에 머리가 부딪칠 정도로 가까이 마주 앉아서 열무김치 소면을 먹었어요. 그해 여름 베를린에서.
후루룩후루룩 염치없는 소리를 한도 없이 내면서 맛있게 먹었어요.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게 꼭 하하하 웃는 소리처럼 들렸어요.

- 황석영 <오래된 정원>


식탁 위의 기쁨을 알고 나니, 혼자 먹을 땐 대충 한 끼를 때우던 습관도 조금씩 사라졌다. 그릇을 고르고 반찬을 담아내는 일이, 누군가를 위해 한 끼를 준비하는 일이(그 '누군가'가 나 혼자일 때조차), 한 끼를 감사히 먹는 일이 사람이 하는 여러 일 중에 가장 중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아침에 만들어준 토스트를 떠올리며 회의 지옥을 견디거나, 늦잠 자고 일어나 먹는 일요일 오전의 짜파게티를 떠올리며 부부 싸움을 면하는 날이 많아졌다. '잘' 먹는 것이 삶의 질을 올린다는 말을 체감하는 중이었다.


오늘 아침엔 오빠가 토스트를 해줬다. 어제 동네 빵집에서 고심해 골라온 호두 식빵을 토스트기에 넣고 계란을 굽는다. 양배추를 썰어 반 접은 토스트에 계란 프라이와 함께 넣고 케첩을 뿌린다. 많이 뿌린다. 왕, 베어 물고 목으로 넘기기 직전 우유 한 모금. 캬, 나의 커다란 행복!

- 회의록 대신 적혀 있던 메모




그러던 작년 여름, 아이를 낳은 뒤 우리의 식탁에도 변화가 생겼다. 정성껏 차려 먹는 일은 고사하고 메뉴를 고민하는 일조차 사치처럼 느껴지던 육아의 고달픔에 적응할 때 즈음, 나의 산후 다이어트가 시작됐다. 다이어트에 진심이었던 몇 개월 동안 우리는 식탁 위의 행복을 잠시 잊고 지냈다. 맛있는(살찌는) 메뉴를 함께 먹지 못한 것은 둘째 치고, 저녁 식사 시간을 당기다 보니 퇴근이 늦은 남편과 식탁에 앉는 일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남편이 저녁을 먹는 동안 나는 여름이를 돌보고, 식사가 끝난 남편 손에 아이를 맡긴 뒤 저녁 운동을 하러 가는 루틴이 반복됐다. 막바지에 이르자 피부만큼이나 우리 관계도 퍼석해진 기분이었다. 식탁 위에서 오가는 건 젓가락만이 아니었음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한 달 간의 식단이 끝나자마자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다 꺼내서 '여름 카레'를 만들었다. 토마토와 가지, 감자, 당근, 애호박, 양파를 큼직하게 썰어 휘휘 볶고, 카레가루를 물에 개어 팔팔 끓이면 끝. 집에 있는 가장 큰 냄비를 꺼내 5인분의 카레를 끓이면서 '이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다시는 식단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함께 했다)

다음 날에는 파스타보다 가지가 많이 들어간 토마토가지파스타를, 그다음 날에는 무보다 고기가 많이 들어간 소고기뭇국을, 오늘은 된장보다 아욱이 많이 들어간 아욱된장국을 끓였다. 내일은 소면보다 오이가 많이 들어간 비빔국수를 만들 계획이다. 식탁 위의 기쁨을 오래 누리기 위해 운동을 하는 거라고 마음을 다잡으며, 오늘 저녁도 '잘' 먹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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