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핑을 하는 기분
파도가 하얗게 부서져 거품처럼 밀려드는 구간, 일명 화이트 워시는 비기너들의 연습 구간이다. 허리춤까지 오는 얕은 바다에 서서 흰 거품에 철썩철썩 따귀를 맞는 여자가 바로 나였다.
발리에서 처음 서핑을 하던 날이 기억난다. 파도의 흐름, 피크(Peak 파도의 가장 높은 부분)와 에이프레임(A-Frame 피크를 기준으로 양방향으로 일정하게 깨지는 형태의 파도) 같은, 들어도 알 수 없는 이론 교육을 한참 듣고 드디어 보드를 받아 들었다. 키를 훌쩍 뛰어넘는 폼보드는 생각보다 많이 무거웠다. 보드를 머리에 이고 휘청거리다가 겨우 걸음을 뗐다. 테라스에 앉은 현지 강사들이 그런 나를 보고 킥킥 웃는다. 길 하나만 건너면 바다인데, 보드를 이고 지고 오는 동안 벌써 지쳐버렸다.
바다가 아닌 모래사장에서 1:1 혹은 1:2로 진행되는 수업. 해맑은 현지인들 사이에서 눈에 띄게 인상을 잔뜩 쓴 내 담당 강사는 패들링(Paddling 보드 위에 누워서 양손으로 물을 저어 보드를 전진시키는 동작)과 테이크 오프(Take off 보드 위에 일어서는 동작) 시범을 간단히 보인 후 계속 반복시킨다. 뭐가 뭔지 모르겠는 채로 그냥 하라니까 열심히 하다가 땀이 난다 싶을 때쯤 바다로 들어갔다.
나 같은 비기너들로 꽉 찬 바다.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커다란 보드와 씨름하며 그들 사이로 들어간다. 이제 믿을 건 인상 쓴 내 선생님뿐이다. 발리 파도가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무섭게 밀려드는 파도를 보며 ‘파도가 좋다는 말은 힘이 세다는 말인가 보다’ 했다.
파도가 그렇게 힘이 센지, 그때 처음 알았다. 배꼽 근처까지 오는 얕은 바다에서 땅에 발을 꽉 딛고 서서 보드를 부여잡고 몸으로 파도와 부딪쳤다. 보드를 놓치면 다른 사람이 맞고 다칠 수 있다는 말에 보드를 꽉 쥔 손끝이 얼얼하다. 게다가 부서지는 파도는 내 키를 훌쩍 뛰어넘는다. 그렇게 몇 번이나 거센 파도를 보내고, 무뚝뚝한 강사가 말없이 보드에 올라가라는 손짓을 보낸다.
뒤에서 파도와 함께 훅 보드를 밀면서 “패들링 패들링!!! 업!!” 신호를 주면 모래에서 땀나게 연습했던 동작을 곧바로 해내야 한다. 땅에서도 제대로 안 되던 패들링과 테이크 오프를 일렁이는 바다에서 하려니 될 턱이 없다. 코앞에서 미끄러지고 떨어지고 심지어는 보드에 앉은 채로 가라앉기를 수십 번. 이제 그만하자 소리가 절로 나올 때쯤, 보드에 서서 해변까지 파도를 타고 갔다. 그 짜릿함이란!
게다가 보드 위에서 희한한 광경을 목격한다. 어정쩡한 자세로 드디어 파도를 타는 나를 향해 따스운 눈빛과 박수와 엄지 척을 날려주는 사람들. 서핑에는 에티켓이 있다. 한 파도에 한 명만 탈 것, 보드를 던지지 말 것, 남의 파도를 훔치지 말 것…. 그중에서도 ‘한 파도에 한 명만’은 절대적 요건에 해당한다. 무슨 소리인지 당최 모르겠던 이론 수업은 이 에티켓을 잘 지키기 위한 기본 개념이었다(파도의 가장 높은 지점인 피크 가까이에 있는 서퍼에게 우선권이 주어지며, 양쪽으로 파도가 부서지는 에이프레임의 경우에만 두 명의 서퍼가 동시에 파도를 탈 수 있다. 물론 나 같은 비기너는 봐도 모른다. 하지만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서핑은 ‘내 파도’를 기다리는 일이다. 나만이 탈 수 있는 내 파도가 온다는 것은 곧, 파도를 낭비하지 않을 책임도 있는 것이다. 비틀비틀 균형을 잡으며 포기하지 않고 파도를 타는 동안, 사람들이 파도의 주인공이 된 내게 축하의 제스처를 보내준 것이다. 이런 멋진 스포츠가 있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