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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Oct 21. 2020

3년 차 권태기 극복기

보통 연애를 시작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처음 느꼈던 감정이 어느새 가라앉고 곧 서로가 시들해지는 지점에 닿는다. 그 정도가 과해지면 ‘권태기’라고 부른다.

연애뿐만 아니다. 어떤 일에서건 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권태를 느끼게 된다.

난 그중 직장에서의 권태기를 심하게 앓았었다.    


3, 6, 9를 기점으로 직딩 권태기가 온다고들 한다. 연 단위면 좀 덜할 텐데, 요즘은 개월 단위로도 찾아온다니 잘 대처하지 않으면 어느새 사표를 쓰고 백수가 되어있는 나를 발견할 수도 있다.

나의 경우엔 개월 단위로 찾아온 권태기는 그럭저럭 버틸만했으나 입사 3년 차에 찾아온 권태기에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취준생일 땐 어디든 합격만 하면 세상 모든 행복이 내 것이 될 것처럼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입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생각했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현실에 좌절하고 분노하며 결국 권태기를 만나 아예 그곳을 떠나는 경우도 허다하다. 나 역시 비슷한 경우였는데 처음에는 이 직장이 나와 맞지 않는 게 아닐까, 어딘가 나와 꼭 맞는 좋은 곳이 있을 텐데 하는 마음이 컸다.

때마침 인생은 욜로(YOLO=You Only Live Once)라는 말이 나오면서, 단 한 번 사는 인생이니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열풍이 불었는데 그 당시 내 눈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죄다 잘 다니던 직장을 멋지게 때려치우고 당장 세계여행을 가든 창업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와중에 꼬박꼬박 출근하는 나 같은 사람들은 멍청하다고 느껴졌으니 실로 상태가 심각했다.    


직딩 3년 차, 당시 나는 일도 나하고 안 맞는 것 같고, 내가 이러려고 여태껏 이렇게나 공부했나 회의감도 대단했으며 그 와중에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도 있어 정말 힘든 한 해를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차라리 일이 힘든 건 어떻게든 견뎌볼 수나 있었지, 사람이 힘들게 하는 건 도무지 답이 없었다.

결국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러 담당 팀장님께 사직을 말씀드렸다.     


그러나 나를 붙잡아준 건 역설적이게도 사람이었다. 팀장님은 나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어주시곤, 휴직을 권하셨다. 잠시 쉬었다 돌아와도 여전히 같은 마음이면 그때 사표를 써도 늦지 않다며 극구 말리셨다. 어쩜 그리 눈물이 나던지.

그렇게 나는 일 년여간 휴직에 들어가 그동안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았던, ‘내 길’이라고 여겼던 길을 가기 위해 시험공부에 매진했다.


결과는 안타깝게도 불합격이었고 그 후 직장으로 복귀했지만 그 1년이 참 소중했다. 내 길인지 네 길인지 분간이 안 갈 만큼 나는 위태로운 상황에 있었고 정신줄을 붙잡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게 내겐 시험공부였고 언젠가부터 아쉬움으로 남아있던 미련을 떨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굉장히 버거운 1년이기도 했다. 회사에서 벗어나기만하면 모든 근심과 슬픔에서 벗어날 줄로 굳게 믿었다. 그러나 항상 불안했고 오히려 더 막막했으며 밤마다 눈물 흘리는 횟수가 많아졌다. 약 없이는 한숨도 잘 수 없었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나를 너무 옥죄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 인생에 ‘MUST’가 너무 많다는 걸 알았다. 내가 그리는 내 모습이 너무 이상적이라는 걸 알았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언제나 새로움을 추구하며, 나 자신을 찾기 위해 과감히 퇴사한 뒤 여행을 떠나고 혹은 나만의 공방을 열고 유투버가 되고...'도전'이라는 걸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처럼 느꼈다.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부족한 나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것에도 must를 붙이는 세상.

이젠 내 감정까지도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혹은 새로운 무엇이라고 나오는 것들이 트렌드니 개성이니 하면서도 종국에는 다 획일화된 것들이었다. 핫플, 인싸템, 인별 맛집, 인증샷 등.

안타깝게도 난 그런 것들이 정말 개성이라고 생각했고, 나날이 새로워지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듯한 나를 원망했으며 남들보다 훨씬 뒤처져 있다는 생각에 견딜 수 없는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차라리 그중 하나에라도 집중했다면 조금 달라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저 집착에 불과했기에 무엇하나 내 마음 정착할 곳은 없었다.

그런 압박감 속에 나는 이 일이 아닌 다른 더 멋진 일을 찾아야 했고 지금 살고 있는 현재와 내 인생은 보잘것없다며 송두리째 부정하고 있었다. 쉽게 눈에 띄는 것들이 사람을 허황되게 만들고 더 공허하게 만든다는 걸 미처 몰랐다.    


나한테 정말 남는 게 무엇인지, 내가 정말 따뜻해지는 게 무엇인지를 생각해봤다.

날 가장 힘들게 한 건 내가 하는 일이 하찮고 별 게 아니며 난 그저 작고 작은 부품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또한 역설적이게도 부품 같은 일상의 소소함을 난 너무 사랑했다.  

권태로움을 느끼는 정도라 해도 안정감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매일 같은 길을 오가며 같은 일을 하며 같은 사람을 만나는 그 단조로운 삶에서도 나는 웃고 있었다.

사실 난 내 일을 좋아하고 있었다.


어느 날 다가온 한 문장이 마치 소화제처럼 내 묵은 체증을 해소했다.

‘어떤 기계든 어떤 조직이든 그 작은 조각 하나가 고장 나서, 그 작은 부품 하나가 없어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

고로 난 그런 존재라고 마음먹었다. 스스로 바라보는 내가 진짜 나다.

그래서 정신승리여도 상관없다. 모름지기 내가 생각하고 바라보는 세상이 전부이기 때문에.    

인간은 저마다의 색안경을 쓰고 산다. 나에게는 지금의 색안경이 좋다.

난 이제 약을 안 먹고도 잠을 잘 수 있고 울지 않으며 출근할 수 있다.

그렇게 난 지금 편안하다.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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