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직장에서 일면식은 있으나 한 번도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는 선생님으로부터 청첩장을 받았다. 물론 그 선생님도 내가 꼭 와주었으면 하는 바람보다는 내가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는 사람이니 예의상 주셨을 거라 생각을 한다. 많은 직장인들이 이럴 때 많은 고민에 빠질 것이다. 기꺼이 초대에 응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응한다면 밥은 먹고 올 것인가 말 것인가. 그렇다면 축의는 얼마를 하면 적당할까. 등등. 슬쩍 결혼당사자와 나와의 관계 수준이 비슷할 법한 동료에게 물어보기도 한다.
아주 가까운 사람이라면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을 담아 성의를 표하겠지만 철저히 일말의 유대감이 없는, 사회적 관계만 있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고민이 된다. 자연스레 그 관계의 형태를 정확히 반영하듯 내 머릿속에서도 계산기가 쉼 없이 돌아간다. 내가 이다음에 저 사람과 같이 근무할 가능성이 얼마나 있을까? 저 사람은 이 직장에 얼마나 다닐까?
사실 몇 년 전 까지는 이러한 고민을 열심히 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지금도 빳빳한 청첩장을 받으면 부담감이 크다. 그렇지만 최소한의 답례는 하는 게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생판 처음 보는 사람에게 본인의 결혼을 알리고 오라고 말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결혼 당사자도 큰 기대는 하지 않을 것이지만 큰 용기를 낸 것이다. 그리고 결혼식 후 사람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태그를 마음속으로 하나씩 붙인다. 초대에 응한 사람, 응하지 않은 사람.
초대에 응한 사람에서 나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준 좋은 사람으로, 초대에 응하지 않은 사람에서 나를 거절한 나쁜 사람으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다. 사람의 마음은 칼 같지 않으며 비슷한 성격끼리 묶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너무 극단적인 예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명백한 사실이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결혼식에 참석 못하더라도 몇만 원 정도의 성의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그 편이 더 싸게 먹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를 듣는다면 누군가는 그러한 생각이 더 계산적이라며 손가락질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만약 나쁜 사람이라면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마음의 부채를 감당하는 쪽은 결국 내가 된다. 상대는 나에게 용기를 내어 내게 청첩장을 주었으나, 내가 거절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이건 순수한 축하도, 완전한 계산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다. 그리고 그게 정직한 사회생활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완벽한 진심을 요구하기엔 우리의 관계망은 너무 넓고 복잡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