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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ilet May 23. 2019

수준이라 불리는 사람의 급수

나의 수준은 어디인가

정확히 8년 만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처음이었다. 아빠는 서울 출장을 왔다며 저녁을 함께 하자 했다. 이태원 경리단길에 있는 파인 다이닝이었다. 최소 일인 코스 요리에 10만 원은 족히 넘는 곳이었다. 남산타워가 보이는 야경을 볼 수 있는 레스토랑은 화려하지 않으면서 진중한 분위기를 풍겼다. 곳곳에 걸린 아트 워크들로 시각적 재미를 더한 듯했다. 요즘 경리단길이 대세잖니. 외국인 손님 접대하던 곳인데 특히 이태리 사람이 거의 현지 음식이라고 좋아하더라고. 나는 이탈리아 출장을 여러 번 갔지만 파스타 한번 사 먹은 적이 없다. 샌드위치나 쿠키로 끼니를 때웠으니깐. 게다가 사실 경리단길의 쇄락이 시작된 지 3년이 지났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이런 까슬까슬한 마음에 비해 테이블은 참 정갈했다. 과하지 않은 장식이 들어간 접시, 가정의 달을 증명하듯 얼굴을 들고 있는 카네이션을 꽂은 유리병. 남들은 어버이날이라고 100만 원씩 용돈을 부치겠지만 나는 70세를 바라보는 아버지에게 13만 원어치 코스 요리를 대접받는구나고 생각할 쯤이었다.


증말 니네 엄마 비위 맞추기 힘들다.

아빠는 지난주에 있었던 외가 모임에 온 이모들 얘기를 꺼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 봐도 비디오였다. 안 그래도 큰 목소리, 우람한 체격 거기에 술까지 더해져 분명 한 판의 씨름장 같았을 것이다. 아빠는 그런 사람들이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생각하는 수준이 너무 낮다며 비판했다. 물론 엄마도 그 5남매 중 첫째인 데다, 첫째가 가진 든든한 리더십과 파워풀함, 나이가 제일 많다는 강점에서 모두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권력이 있기도 했다. 함부로라는 것은 상황과 상대에 대해 자신의 기준으로 단정을 짓고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큰소리로 말하는 정도가 되겠다.


나의 아저씨에 이러한 대사가 나온다. 돈이 있는 사람은 착한 사람 되기 쉬워. 아이유가 수화로 할머니에게 하는 말이었는데 참 가슴에 와 닿아서 코끝이 찡해졌던 장면이다.

6.25 전쟁 직후 2년 후 아빠가 태어났고, 엄마도 4년 뒤 태어났다. 엄마는 충청북도 산골 어딘가 찢어지게 가난한 오 남매 중 첫째로, 아빠는 서울 돈암동 으리으리한 가옥의 막내로. 나는 여기서부터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 그 둘을 어떻게든 만나게 했다는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은 계몽이나 상부상조 같은 것이 아니다. 그건 벌이다. 두 사람이 만나서 결혼을 하고 나를 낳은 것은 신이 내린 벌의 과정 중 하나다. 어떤 죄를 짓고 그런 일을 당하고 있는진 나도 모르겠다.


우리 집에 말이야 글쎄, 내가 17살이 될 때까지 식모가 있었어! 그 어려운 시절에 말이야! 그런데 하루는 그 애가 내 미제 땅콩버터를 몰래 먹어치우고 배탈이 났지 뭐야. 정말 웃기지. 사람도 먹던 걸 먹어야 탈이 안 나.


난 상상했다. 그 집에 들어온 여자, 그 식모가 엄마라면. 혹은 어렵게 사는 어떤 내 친구라면. 코스 요리로 계속 나오는 음식들은 날 시험케 했다. 마치 요리가 ‘이 비싼 요리를 네가 먹던 사람인지 한번 볼까?’ 그리고 궁금해졌다. 과연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가 맞는 것인지. 그냥 돈이 있어 수준이라는 것이 생기고 없으니 바닥에서 허덕이는 것 아닐까.


사람이 백만 원을 벌어도 무슨 일을 해서 버는지가 중요하다. 이 말은 내가 아빠에게 평생 듣고 새긴 말이다. 아무리 가난해도 멋지게 입고 다니고 남들 앞에서 당당하게 보여라. 추가로 이것도. (덕분에 지금 내 6평짜리 집은 3평에서 옷 산사태와 범람이 일어난다.) 의문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다. 돈 없이 사람의 수준을 만드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책을 읽으려고 해도 돈이고 세상 밖에 나가 구경을 하려고 해도 돈이 든다.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과연 외가 친척은 돈이 없어서 수준이 낮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인간 자체가 바닥인 건지 말이다. 그럼 처음부터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은 그 ‘수준’이라는 것을 까치발로도 만져보지 못하고 평생 네 발로 노동만 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 수준이라는 것을 어디서 얻어야 할까.


웃기게도, 난 그날 저녁 네 번의 설사를 했고 다음 날 아침까지 설사를 한 번 더 했다. 나라는 사람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 같아 끝없는 설사가 더 지독하게 느껴졌다. 난생처음 아빠가 꺼낸 자신 맘 속에 있었던 얘기. 고마웠다. 그래도 내가 꽤 알 건 알 나이라고 생각해주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아직 설사나 해버리는 나약한 수준의 딸이다. 앞으로 먹던 밥이나 잘 먹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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