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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ilet May 27. 2019

태어난 것이 죄라면

다시 죽을 수도 없다면

오래전 동물의 왕국에서 뻐꾸기 특집을 했다. (동물의 왕국인지 내셔널지오그래픽 따위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학교 끝나고 집에 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던 초등학생은 뻐꾸기의 일생을 한참 보고 있었다. 뻐꾸기는 사실 다른 열대 지방의 화려한 색을 갖춘 새들에 비해 매혹적인 외모는 아니었다. 멋을 낸 비둘기 정도라고 할까. 또 아기 새에게 먹이를 주려고 최대한 입을 벌릴 때 악당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느낌이라 별로 아름다운 생명체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곧이어 등장하는 뻐꾸기의 일대기는 그 초등학생에게 삶이라는 그 자체가 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아니 어쩌면 누군가의 계시로 인해 그 초등학생이 꼭 봐야 하는, 당신의 인생이 이렇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준비된 순간일지도 모른다. 흔히 알고 있는 얘기지만 뻐꾸기는 자신의 둥지를 만들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고, 그 둥지 주인인 새가 알아서 키우게 둔다. 중요한 건 그다음부터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는 종종 진짜 어미 뻐꾸기가 물어다 주는 밥을 맛있게 먹는다. 둥지 주인인 새 역시 자기 새끼인 줄 알고 맛있게 먹인다. 다른 새보다 밥을 많이 먹고 무럭무럭 자란 우리의 뻐꾸기는 함께 지내던 다른 동료 새끼들을 날개로 휘적여 모두 바닥으로 추락시킨다. 그렇게 새끼 뻐꾸기는 그 둥지의 왕이 된다. 태어나자마자 다른 세 마리의 새끼를 죽인 뻐꾸기 삶의 시작. 그것은 어미 뻐꾸기의 철저한 계획대로 잘 진행됐으며 결국 성조가 되면 날아가 또 다른 둥지에 알을 낳을 것이다.


초등학생은 그 다큐멘터리가 항상 잊히지 않았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내가 바로 그 새끼 뻐꾸기처럼 살아왔다는 것이다. 엄마는 나를 낳기 위해 내 동생들을 다 일부러 유산했다. 오로지 나를 제대로 된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서, 오로지 나에게 모든 것을 쏟아 자신의 가난과 불행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나는 불행한 새끼 뻐꾸기가 됐다. 언제나 남의 집에 얹혀사는 듯한 불편함, 차라리 보육원에 가서 빌어먹고 싶은 방황의 태도. 나도 언젠가 누군가를 만나 새끼를 낳고 죄를 짓게 만드는 망상은 끝없이 되풀이됐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다른 자식들은 태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부부는 쉽게 헤어져 새로운 삶을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차라리 내가 없어져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순간, 손목을 몇 번이나 긋고 수술대에 누웠을 때 그게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었다면. 모든 것을 끝내는 방법이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확신했던 그때, 스스로 이 삶이 벌이라고 생각을 바꿔보니 죽지도 못했다. 태어난 것이 죄이자 벌이라 믿는 사람이 있다면 만나고 싶다. 당신도 나처럼 이 삶을 그저 죄로 받아들이기로 한 건지 혹은 죽음을 계획하고 있는지. 영화 킬링 디어에서 마틴이 말한 것처럼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이건 은유예요. 상징 같은 거죠.’

태어난 죄는 나에게 완전히 스몄고, 자연스레 벌을 받은 삶이 되었다. 새끼 뻐꾸기는 아직도 둥지에서 죄 없는 새들을 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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