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의 브런치 글빵 연구소 17강 숙제
부동산 사무실을 운영하던 시절, 여러 건의 계약성사로 인해 친분이 생긴 임대인이 있었다.
어느 날 아침부터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집을 찾는 손님들을 상담하고 집을 내놓은 임대인 분들의 매물을 접수하느라 진을 뺐던 날이 있었다. 그렇게 바쁜 시간을 보내고 나니 커피 생각이 간절해서 커피 포트에 물을 올리고 좋아하는 머그컵에 믹스커피 한 개를 털어놓고 물이 끓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사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또 오셨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사무실 입구를 바라봤는데 눈에 먼저 눈에 온 것은 화분이었다.
이내 그 화분을 들고 오신 임대인분 모습이 보였다.
자신이 키우고 있는 국화 화분 중에서 국화가 예쁘게 피어 있는 것으로 골라왔다고 하시면서 내게 화분을 건네셨다. 화려한 연보라색을 띠고 있는 국화였다.
한눈에 봐도 너무나 어여쁜 국화여서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국화.
내가 당황한 눈빛으로 임대인을 바라봤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임대인은 웃으시면서 내게 주고 싶어서 가져왔노라고 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원룸 건물에 좋은 임차인들과 계약하게 해 주어서 고맙다는 말씀과 함께 때때로 부탁하는 것들을 잘 들어주어서 고맙다는 말씀도 덧붙이시며 들고 오신 화분을 사무실 가운데에 내려놓으셨다.
그리곤 국화에 물 주는 방법과 시기 등을 알려주시며 다음에도 원한다면 국화를 또 주시겠다고 하셨다.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나서 다시 찬찬히 바라본 연보라색 국화는 예뻤고 그 국화로 인해 사무실이 한결 더 환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국화를 바라보고 있자니 어릴 적에 내 태몽에 대해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내 태몽은 하얀 국화였다고 한다.
국화는 일반적으로 9월에서 11월 사이에 꽃을 피우는 식물로 알려져 있다.
1년 12달 중에서 그 해의 절반을 훨씬 넘긴 끄트머리쯤에 꽃을 피우고 그래서 가을을 대표하는 꽃이기도 하다.
꽃들마다 자신을 피우는 시기는 다 다른데 벚꽃이나 목련은 봄에 피고 능소화나 수국은 여름에 피며 동백꽃이나 크리스마스 로즈는 겨울에 핀다.
이렇게 꽃들도 자신이 피어나는 계절과 그 시기에 맞추어서 피어나건만 난 때때로 그 자연스러운 것들을 거슬렀던 것 같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 또한 성공이라는 목표에 집착을 했었고 한창 푸릇하게 빛나야 할 청춘의 시기를 맘껏 누려보지 못한 채 치열하게 살았다.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으니 좋은 결과치가 내 눈앞에 있어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세상은 아직 때가 아니라는 듯이 그 어떤 것도 쉽게 내어 주지 않았다.
공부도 사업도 벽에 막혀서 고민을 했던 시기에 난 더 전진하기를 결심하기보다는 후퇴를 하거나 멈추는 것을 선택했었다.
어느 것 하나 마음먹은 대로 풀리는 것이 없었고 그러다 보니 조급한 마음만 앞섰던 시간들이었다.
현실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은데 난 왜 그렇게 쉽게 선택을 하고 또 쉽게 물러섰을까?
나 스스로를 괴롭히는 생각들은 나를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나 보다.
그런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까...
그냥 그렇게 조각조각 찢긴 채로 있는 나를 내버려 두면 우울함이 나를 더 가두어둘 것 같아서 마음을 털어내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쓴 글에서 가장 많이 보인 단어들이 보였다.
'조급함'과 '불안'과 '고통'
그 낱말들이 나를 꽉 붙잡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진원지는 어디일까?를 생각하며 마음속 여행을 떠나봤다.
그렇게 마음 구석구석을 헤매고 다니다 보니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 있었다.
'아... 너였구나.'
'욕심'이 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내가 너를 그렇게 힘들게 한 당사자라고 자랑하고 싶었다는 듯이 밉도록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욕심이 내게 말했다.
"내가 널 왜 그렇게 힘들게 했는지 알아?"
"몰라. 난 그냥 내가 살고픈 방향으로 가고 싶어서 노력했을 뿐이었어. 그런데 그렇게 되지가 않아서 힘들었는데 날 왜 그렇게 힘들게 한 거야?"
"노력이라... 음... 넌 네가 되게 노력을 많이 한 줄 아나 봐. 어이가 없다야. 그래서 네가 안 되는 거였는데 넌 그걸 모르고 너 자신만 괴롭히더라."
"아니야! 난 나름대로 노력 많이 했어. 함부로 나의 그런 시간들을 폄하하지 마."
욕심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넌 기본적인 노력만 했을 뿐이야. 너 정도로 노력하는 사람들은 사방에 널리고 널렸어. 그리고 네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인생에서는 노력은 기본값이고 고통도 기본값이라는 걸 말이야. 그리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불안한 것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데 넌 그런 간단한 것도 모르고 살았으니 너만 힘들었지. 그걸 받아들이면 아마 네 마음도 많이 편안해질걸?"
아, 또 한 가지 말해주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이 지구에 태어난 존재들에겐 자신을 드러낼 시기가 정해져 있거든? 또 분명히 와. 단지 그 시기가 다 다를 뿐. 그러니 좀 차분하게 기다리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어. 즉 너를 그만 좀 괴롭히라고."
그렇게 마음의 여행을 끝내고 현실로 돌아온 나.
유독 형제들 중에서 잘 풀리지 않는다고 한탄을 했던 나에게 엄마가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네 태몽이 국화라 그런가 봐. 국화는 가을에 피는 꽃이고 꽃들 중에선 제법 늦게 피는 꽃이잖니.
어쩌면 네가 늦게 잘 되려고 그런가 보다. 그러니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라."
엄마조차도 나에게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임대인분한테서 국화 화분을 선물받은 이후로 하얀색을 띠는 국화 화분을 선물로 또 받았다.
그리고 나를 대표하다시피 한 '조급함'을 잠재우고 싶어서 매년 국화를 키우고 있다.
내가 키워서 피어난 국화를 볼 때면 새삼스럽게 깨닫곤 한다.
'국화 너도 그동안 오래 기다렸다가 네 계절이 다가오니 이렇게 피어나고 있구나. 그런 너의 모습을 나도 좀 닮아야겠지?
작년 12월 추운 겨울에 하얗게 피어났던 국화들.
전문가의 손길을 가지지 못해 한 두송이 정도로 탐스럽게 열리는 국화는 아니지만 여러 송이의 국화들이 피어있는 모습도 마음에 들었다.
인생의 꽃이 피는 시기가 다르듯 올해 늦가을이나 초겨울에 꽃 필 시기가 되면 이렇게 하얀 꽃송이를 피우며 자신의 계절을 맞이할 것이다.
그렇게 피어난 국화들에게 인사를 건네야겠다.
"안녕? 국화야, 올해 가을도 너의 화양연화를 맞이한 걸 축하해. 그리고 반가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