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해지지 않는 아픈 얼굴
계란야채 죽, 끓인 누룽지, 두부 브로콜리 죽. 어제 우리 식탁에 올랐던 삼 시 세끼 식단이다. 누군가 아프지 않으면 올라오지 않을 음식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어제 이른 아침, 평소보다 일찌감치 깬 아들이 아픔을 호소했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잠이 더 안 오고 몸이 불편하다고. 놀란 파랑이 바로 체온을 재보니 38도였다. 해열제를 먹이고 내 옆에 편안하게 눕혀서 토닥여 주었다. 아직 감기가 낫지 않은 파랑을 다시 침실로 보냈다.
약 기운 덕분인지 아들은 곧 심심하다고 했다가 배고프다고 했다. 죽이 먹고 싶다고 해서 몇 번 해주었던 계란야채 죽을 끓여 줬다. 많이 먹진 못했지만 맛있게 먹고는 상태가 좋아졌다. 아들을 거실 소파에 편안하게 앉혀두고 이제 나도 한 술 뜨려고 식탁으로 돌아오는 순간.
'웩' (와르르)
상태가 좋지 않았다. 먹은 것을 모두 토해냈다. 나 혼자였기에 신속한 상황 판단이 필요했다. 우선 물건들은 모두 내버려 두고 아들을 번쩍 들어 자리에서 빼냈다. 옷을 벗겨서 따뜻한 물로 씻도록 욕조에 넣었다. 아들에게 내가 돌아올 때까지 편안하게 씻고 있으라고 일러두곤 다시 현장으로 향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열심히 닦아냈다. 잠옷, 쿠션 커버 모두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 이제 남은 것은 소파와 카펫. 잠깐 막막했지만 나름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생각을 지운 뒤 치우고 닦고를 반복했다. 마무리가 될 때쯤 파랑이 잠에서 일어났다.
파랑이 아들을 새 잠옷으로 입혀주는 동안 난 아들 학교에 전화했다. 아들이 아파서 오늘 못 간다고. 산뜻한 얼굴로 돌아온 아들에게 말했다.
[나] 아들 괜찮아? 속 안 좋은데 죽 괜히 먹었나?
[아들] 아냐~ 덕분에 토해서 속이 좋아졌어~
말만 그런 것은 아니었는지 하루 종일 집에서 신나게 같이 놀았다. 아들이 태어난 뒤 어쩌다 이렇게 아프면 모든 게 멈춘다. 그 어떤 일도 앞설 수 없다. 하나 달라진 것은 내가 회사에 아쉬운 소리 할 필요가 없어진 거다. 아이가 아프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잠시 미루어두고 옆에서 있으면 된다. 그렇게 오랜만에 꼭 붙어있는 꽉 찬 하루를 보냈다.
방금 재고 나온 체온이 아직 미열이라 걱정은 남아있다. 안 아플 순 없겠지만 그래도 덜 아프고 자랐으면 하는 욕심이 있다. 아픈 아이의 얼굴을 보는 것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다.
지난주 하굣길에 아들이 딱 그 표정으로 내게 소식을 전했다. 자랑스럽고 쑥스럽지만 막 티 내기 어려운 그런 표정. 놀라운 소식을 담은 편지가 가방에 들어있다고 했다. 궁금함에 집에 돌아와서 확인해 보니 작은 카드에 이렇게 적혀있었다.
'Morning Tea With The Stars'
이번 Term의 반 대표 Star Student로 뽑혀서 교장 선생님과의 만남을 가진다는 놀라운 이야기였다. 아들에게 마구 칭찬과 고마움을 표현했다. 학교생활 즐겁게 잘해줘서 자랑스럽다고. 담임 선생님께 감사 메일을 보냈고 바로 답장을 보내주셨다.
'Joon is a beautiful human and diligent student.'
이보다 더 기쁘고 아름다운 말이 있을까? 90% 정도는 아들이 예뻐서 좋았고 10% 정도는 주 양육자로서 스스로가 기특해서 행복했다.
드디어 행사가 있는 월요일 아침 D day! 아들은 아침부터 두근두근하고 떨려했다. 우리는 가서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오라고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그날 하교 후 후기를 들어보니 정말 아들다웠다. 열심히 말씀하셨던 교장 선생님 말씀은 하나도 기억을 못 했다. 눈앞에 있는 선물 꾸러미를 보고는 너무 커서 가방에 어떻게 넣을지 고민만 했다고. 하하. 그러느라 주어진 간식도 못 먹고 결국 끝나고 나서 주섬주섬 제 몫을 챙겨서 왔다고. 아침에 왁스로 머리 스타일링을 해주었는데 그게 아무 소용이 없었단다. Star Student 왕관을 써야 해서 의미가 없었다고. 그날 아들 얼굴에는 스스로 자랑스럽고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온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아, 어제 이번 Term 2를 마무리하는 아카데믹 리포트(학업 성취 보고서?)를 받았다. 아들은 놀라울 정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난 다른 많은 성취들 보다도 모든 영역에서 아들의 노력이 아주 높다는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 그거면 되는 거야! 열심히 배우고 해 보는 자세만 갖추면 된다.
아들은 멋지게 자라고 있다.
1. 조크 만들기
요즘 아들은 직접 만드는 농담에 빠져있다. 학교에서도 쉬는 시간에 혼자 햇볕에 앉아서 어떤 농담을 친구들에게 해줄지 고민한다고 한다. 그리고는 점심시간에 그 조크를 나눠준다고. 하하. 기억에 남는 조크를 하나 남겨둔다.
Q : 좀비(Zombie)가 쫓아오면 집에서 어디로 숨어야 하나?
A : 리빙(Living) 룸!
죽은 자를 피하려면 살아있는 곳으로 간다는 발상이 기가 막히지 않은가?
2. 아빠 지적
아들이 수영 레슨은 받는 시간은 30분이다. 아들이 오고 가는 순간에는 무엇을 배우나 지켜본다. 다른 친구들 차례가 되면 습관적으로 폰으로 책을 본다. 어느 날 아들이 끝나고 한 마디 했다. '아빠! 여기 이거 봤지? 핸드폰 말고 아이를 보라고 하잖아.' (아이를 지켜보라는 안내 포스터를 가리키며) 미안하다. 이제 영어 참 잘하네.
3. 약점 공략
한글 책을 읽다 보면 새로운 표현이 나온다. '엄마~ 누구한테 약한 게 뭐야?' 파랑이 아들에게 잘 설명해주니 아들 얼굴이 환해진다. '아! 그 이야기구나. 아빠가 나한테 약하잖아!' 짜식, 내 약점을 잘 알고 있네.
4. 표현 따라 하기
파랑이 감기가 많이 나아진 듯해서 머리를 좀 굴렸다.
[나] '아들~ 오늘은 엄마랑 인형 놀이하고 잘 거지?'
[아들] '아빠~ 모두 같이 할 거야! 슬쩍 빠져나가지 말고!'
[나] 'ㅋㅋ 슬쩍 빠져나간다는 말은 언제 배웠담?'
[아들] '내가 맨날 한글 놀이 안 하려고 할 때 아빠한테 들은 말이거든~'
놀랍고 웃기기도 하지만 늘 두려움이 같이 따라온다. 내게서 얼마나 나쁜 말과 행동을 배웠을까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