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나리아>
‘행복한 가정은 모두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안나 카레니나> 톨스토이
유일하게 기억하는 책의 첫 문장이다. 이제는 보기 어렵지만 어렸을 적엔 공익광고나 캠페인으로 행복한 가정의 모습이 자주 대중매체에 등장했다. 거의 판에 박힌 듯한 멋지고 예쁜 젊은 엄마 아빠와 한 없이 밝은 남매가 한 컷에 담겼다. 어린 마음에 ‘와, 저 사람들은 무엇이 저리도 좋아서 저렇게 계속 웃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미디어의 영향이 컸었는지 아니면 이미 그렇게 교육을 받고 자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 네 가족의 활짝 웃는 얼굴이 바로 ‘행복한 가족, 이상적인 가정’이라고 쉽게 각인되었다. 마치 저런 모습이 아니라면 모두 불행한 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좀 더 크면서 직접 살아보고 다른 사람과 부대끼며 지내봐도 고정된 아름다운 이미지의 ‘행복한 가족, 이상적인 가정’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을 만나기 어려웠다. 모두 제각각의 말 못 할 사정이 하나씩은 꼭 있었다. 더 커버린 지금, 아직까지도 어린 기억 속의 ‘늘 행복한 가족’은 만나보지 못했다. 소문으로도 전해 듣지 못했다. 결국 이런 생각을 해버렸다. ‘아, 저건 실재하지 않구나.’ 물론 내가 모른다고 그게 없다고 보는 것만큼 무식한 판단은 없다. 하지만 내 이런 결론은 그것과 달랐다.
다시 처음의 톨스토이의 첫 문장으로 돌아가 보자. 동의한다. ‘가정’이라는 말을 ‘사람’으로 바꾸어도 성립한다. ‘행복한 사람은 모두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사람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주변의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과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떠올리면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이 문장에는 숨겨져 있는 내용이 있다. 행복한 사람이라고 늘 행복한 일만 있는 것이 아니고, 불행한 사람이라도 항상 불행한 일만 있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을 돌이켜보자. 정말 모두 행복했는가? 아니면 하나도 빠짐없이 불행했는가? 기쁨, 즐거움과 슬픔, 절망은 비슷한 빈도와 세기로 우리네 삶에 찾아온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행복하게 살아가고, 누군가는 불행하게 살아간다. 그건 삶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달라진다고 믿는다. 내 나름의 해석이지만 어쩌면 톨스토이는 삶의 태도에 따라 누군가는 행복하고 누군가는 불행하게 살아간다고 이야기하려던 건 아닐까?
달고 쓴 것이 늘 혼재되어 있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내 삶의 태도’에 달렸다. 좋은 일과 나쁜 일, 기쁜 일과 슬픈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거나 조절할 수 없다. 일은 그냥 벌어지는 것이다. 누가 어찌해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일이 벌어지고 나서는 많은 것이 달라진다. 누군가는 그것에서 의미를 찾아 나아가고, 누군가는 저주하며 주저앉는다. 반복되어 쌓이다 보면 행복한 사람, 불행한 사람으로 나누어진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
요즘과 같은 언택트 시대에 다른 사람을 만나는 장소는 주로 SNS다. 그곳엔 모두 밝고, 멋지고, 행복한 모습뿐이다. 그렇다고 굳이 이 모습들을 보고 상대적인 불행함, 박탈감, 우울함을 느낄 필요가 있을까? 그저 인생에서 벌어지는 밝은 쪽 사건일 뿐이다. 누구도 반대쪽 어두운 사건을 올리거나 공유하지 않는다. 어디에나 빛과 어둠이 있듯이 다른 쪽이 있는 걸 모두 알고 있다. 사람들은 좋은 모습을 더 보여주고 싶고 이로 인해 더 나은 기분을 느끼고 싶어 한다. 단지 그게 그들의 행복을 위한 삶의 자세일 뿐이다.
반대의 경우는 없을까? 어두운 일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중에 남에게 보여서 더 나은 기분을 느끼고 싶은 경우 말이다. 스스로를 치유, 위로하고 타인에게도 위로를 건넬 수 있는 ‘글쓰기’가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자신의 상처, 고민을 솔직하게 풀어낸 글에는 쓰면서 스스로 정리된 감정이 있다. 독자는 읽으며 비슷한 경우라면 공감을 하고, 아닌 경우라도 이해의 노력과 위로를 할 수 있다. 슬픈 마음이 담긴 글도 반짝이는 예쁜 사진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절망스럽고 불행하기 때문이 아니라, 삶에는 이런 면도 있을 수밖에 없기에 이를 인정하는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이다.
삶은 복잡하다. 무슨 짓을 해도 한결같이 웃고 있는 기억 속의 그 ‘행복한 가족’처럼 항상 지낼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확실하게 안다. 가끔은 행복하기 위해 행복하지 않은 것을 모른 척하며 살기도 한다. 이런 임시방편은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고 그때 곪아있던 어두운 쪽이 갑자기 몰려오게 된다. 돌아보면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것을 숨기고 포장하지 않고 솔직하고 떳떳하게 대하는 게 최선이었다. 기쁜 일에는 마음껏 웃으며 행복할 수 있었고, 슬픈 일에도 마음껏 울며 털어낼 수 있었다. 그러고 나면 다시 나아갈 수 있었다. 따로 뒤에 숨기거나 숨을 필요 없이 후련하게 앞으로 갈 수 있었다.
모두가 외치는 ‘행복한 삶’, 막연한 동경으로 언제 오나 하고 목을 빼고 둘러보고 기다렸었다. 어느 날 갑자기 특별한 이벤트가 벌어져서 내 삶을 한꺼번에 뒤바꿔버리는 일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일상 가운데서 나의 결정으로 그것을 대하며 차곡차곡 쌓으면서 살아갈 것이다. 어떤 삶을 행복하다 불행하다로 규정짓는 것도 틀린 것이 아닐까 싶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기 때문에.
인생의 예쁘고 빛나는 모습과 거리가 있는 민낯을 담고 있는 이 책. 삶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해 준 이 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읽어보면 좋겠다. 지금 행복하든 불행하든 관계없이.
‘플라나리아’ (야마모토 후미오/창해) - 2018 완독
주인공은 모두 여성이다. 읽고 보니 여성작가였다. 전에 경험했던 일본 여성 작가의 소소하고 행복한 분위기는 적었고, 다소 우울한 뉘앙스가 전체적으로 흘렀다. 끝까지 재미있게 읽히는 소설임에는 틀림없다. 한 없이 우울하게 써 내려가지 않고, 담담하게 주인공의 내면을 표현하며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절묘한 수준으로 묘사되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이란 이상향으로 보이는 거짓된 행복의 모습이 아니고 이런 민낯과 같은 모습이 진실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내 삶에도 우리의 삶에도 그저 행복하기만 한 모습만 있는 건 아니지만 때론 일부러 그것을 외면하기도 하고 별다르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지. 행복하기 위해서 행복하지 않은 것을 모른 척하면서.
삐딱한 표지 사진 한 장 없는 서평을 고집스럽게 쓰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