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파랑(아내)과 연애 시절부터 다툼이 일어나는 포인트가 항상 똑같다. 바로 과거의 기억이 서로 다를 때다. 나는 이런 말과 행동을 했다고 기억하고 있는데 그녀는 그렇지 않다. 미묘한 차이가 있기도 하고 완전히 다르게 기억하기도 한다. 답답한 마음에 내가 습관적으로 외치는 말이 있다. "CCTV가 있으면 좋겠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완벽하게 영상으로 남길 수 있다면 이런 오해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 때문이다. 이 희망에는 당연히 '내 기억이 옳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내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기에 억울함을 풀어줄 객관적인 근거에 대한 목마름이다. 나를 위한 뉘앙스가 깔린 이 멘트는 파랑에게 바로 캐치당하므로 우리의 다툼에선 그저 마이너스 요소에 불과하다. "그건 너만 옳다고 믿으니까 하는 말이잖아! (이하 생략)"
바로 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 나타나서 "여기 있어요. 그 CCTV. 모두 기록되어 있어요."라고 한다면? 난 누구보다도 반갑게 맞이할 테다. 어서 그때 그 시점으로 돌려서 내 기억을 뒷받침하고 싶어 안달이 날 것이다. 찝찝한 얼굴의 파랑도 뭐라 하지는 못하고 자신의 기억이 맞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어디 한번 보자고 할 것이고. 그래, 찾았다. 바로 이 때다. 영상을 돌려보자!
...............
우린 한 동안 말이 없었다. 충격과 허탈함이 컸기 때문이다. 내 기억도 틀렸고 파랑의 기억도 틀렸다. 우리 각각의 기억은 모두 상대방이 잘못했다는 내용이었는데 결국 우리의 잘못이 아닌 아주 엉뚱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우린 왜 사실과 다르게 기억을 하고 있었을까?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둘 다 몽땅 잘못 알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기억을 곧 잘 믿는다. 특히 내게 일어난 일이나 내가 했던 말과 행동에 대해서는 철썩 같이 믿는다. 나보다 내 과거를 더 잘 아는 사람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주 가끔 "너 옛날에 이랬던 거 알아?"라고 다른 이가 내 기억과 다른 이야기를 해줄 때가 있다. 많이 놀란다. 내가 기억하는 것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어서. 그럴 때마다 '남이 기억하는 것이 다를 수 있구나. 그래도 내가 제일 나와 가까우니 진실은 변함없이 내 기억이겠지.'라고 정리한다. 지금까지도 나에 대한 과거의 일은 전적으로 나에게 의존한다. 주인공인 내가 잘못 기억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믿으며.
만약 아니라면? 우리 기억이 '진실'과 거리가 있다면? 그동안 여러 학자들의 연구와 노력으로 우리의 기억이 편향되고 왜곡되어있는 것으로 증명되고 주장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잘못된 기억은 내가 아닌 몇몇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기억은 완전하고 무구하니까. 그러다 어느 날 우리 모두가 과거의 모든 영상을 돌려 볼 수 있게 된다면? 그 영상 속의 진짜와 내 기억이 많이 다르다면? 굳게 믿어왔던 확고한 자신감은 무너져 버릴 것이다. 더 이상 내 기억을 믿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이제 아무것도 기억하려 애쓰지 않을 것이다. 내 기억은 믿을 수 있는 완벽한 대상이 아닌 그저 내 마음대로 만들어 낸 이야기에 불과하니까.
이런 세상이 오면 좋아질까? 과거의 오해로 인해 친구, 가족, 연인들은 더 이상 싸울 일이 없어질까? 과거를 추억하고 곱씹을 필요가 없어지므로 현재, 바로 지금에 더욱 집중하게 될까? 후회와 반성으로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무한한 가능성의 시간인 미래를 그리며 살게 될까? 상상해보자. 지금도 이미 우리의 모든 것이 기록되는 세상이다. 나중에는 특정 장소의 CCTV가 사라지고 개인별 인생이 모두 기록될지도 모른다. 궁금하면 언제든 그때로 돌아가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자서전도 따로 필요 없을 것이다. 그저 기록된 사실을 요약하면 될 터이니. 이런 뒤를 돌아볼 필요 없는 세상. 피할 수 없는 진실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지난날.
상상도 안 되지만 상상하고 싶지 않다. 뭔가 죽어있는 기분이다. 지난 일이 생명을 잃어버려 쓸모가 없어지는 느낌이다. 지금까지 내 과거는 나라는 사람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여전히 지금의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비록 그 기억이 나에 의해 뒤틀리고 변형되어 있더라도 말이다. 그 달라진 기억조차도 내 일부로서 유효하다. 저런 미래가 오지 않는 게 좋겠다. 차라리 지금처럼 서로의 다른 기억으로 파랑과 주기적으로 다투며 우리의 기억의 한계를 절감하는 편이 낫겠다. 그러면 좀 더 살아있는 기분일 것 같다. 하나의 사건이 개개인에 의해 다르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게 좀 더 인간적이다. 유리하게 기억을 요리할 기회를 빼앗기고 싶지 않다.
혹시 모든 것이 완벽하게 기억되는 우리의 미래를 제대로 느껴보고 싶다면, 이 위대한 작가의 단편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을 읽어보자. 우리가 어떻게 기억하는지, 그리고 그 기억이 얼마나 잘못되어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충격이 아주 클 터이니 심호흡을 크게 하고 시작하길 권장한다.
<숨> (테드 창) - 2021 완독
와... 이건 뭐라고 해야 할지... 이런 엄청난 소설을 한꺼번에 이렇게 읽어도 되나 싶다. 각 단편들마다 그 무게와 정성이 보통이 아니다. 작가는 천재이며 천재 작가다.
배경지식이 더 풍부하면 보다 풍성하게 즐길 수 있었을 테지만 백지상태로 즐겨도 무방할 만큼 재밌고 쉽게 쓰이고 읽히는 소설이다. 개인 차는 있을 수 있다. 논리적으로 흐름을 따라가면서 내가 지금 어디쯤에 와있는지 확인하며 나아가야 하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를 놓치면 이게 뭔가 싶은 상태로 끝날 수 있다.
전체적인 느낌이나 각 단편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그저 강력 추천이다. 소설을 좋아하든, SF소설을 좋아하든 상관없이 읽는 것을 즐긴다면 누구나 행복하게 빠져들 수 있는 걸작이다. 이 위대한 작가가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에 무척이나 감사하다.
삐딱한 표지 사진 한 장 없는 서평을 고집스럽게 쓰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