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우리는 불안과 궁금함 속에 살아간다. 내가 방금 한 선택이 최선이었는지 불안해하고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지 궁금해한다. 인생은 태어나서(Birth) 죽을 때까지(Death) 선택(Choice)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라더니 정말 그렇다.(B-C-D) 남들과 비교하고 경쟁하는 것도 계속되는 선택 때문이다. 내가 내린 결정과 다른 이의 결정 중 무엇이 더 옳고 나았는지 노심초사하며 지켜보고 가끔은 안도를 때로는 질투를 느낀다.
자본주의 사회는 이런 더 나은 선택을 추구하는 심리를 한껏 이용한다. 회사는 이게 최고의 선택이라며 광고하고 다른 것을 사면 후회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더 나아가 입큰 사람을 몰래 지원하여 써 봤더니 정말 좋다고 알리며 안심하게 만드는 방법도 이용한다. 얄팍한 수가 생각보다 잘 먹힌다. 그만큼 순간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있는 우리는 늘 어려워한다. 물건을 구매할 때나 음식을 먹을 때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자주 마주하는 경우도 쉬워지지 않는다. 그러니 인생에 몇 번 있지 않는 대학, 취업, 결혼 등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이 고통스럽다.
크고 작았던 선택은 무작정 미룰 수 없기에 지금까지 어떻게든 결정을 해서 흘러왔다. 선택이 끝난 뒤에는 깔끔하게 돌아서서 다른 선택으로 향하면 참 좋을 텐데 그러기 쉽지 않다. 내 선택이 정말 옳았던 것인지 계속 판단하며 돌아보게 된다. 여기서 어쩌면 우리 인생에서 가장 무의미한 '만약?'이 등장한다. '만약 내가 이 선택을 했더라면?' 멈추고 싶은 이 생각은 계속 우리를 따라온다. 특히 내가 했던 선택에 의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더욱 심해진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해서 이런 걸까? 결국 그때 그랬어야 했던 걸까?' 하지만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른 선택을 했었다고 해서 어떻게 내 삶이 바뀌었을지는 영원히 모른다. 어쩌면 다른 쪽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막연한 동경이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일부러 그쪽은 지금보다는 나았을 거라는 희망 섞인 확신으로 내버려 두고 가끔 쳐다보는지도.
혹시 '평행우주', '평행세계'라고 들어보았는가? 그곳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유사하고 그곳의 나인 '평행자아'가 살아간다. 실제로는 아주 똑같은 세계가 아닌데, 이유는 그곳에서 일어난 선택이 이곳과 달랐기 때문이다. 평행세계에서도 이곳과 마찬가지로 선택이 계속 이루어지는데 또 다른 나는 다른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서 한 사람의 인생도 그리고 그 전체 세상이 미묘하지만 결국에는 아주 다르게 변한다. 이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면 우리는 가장 먼저 무엇을 보고 싶을까. 당연히 그곳에 사는 또 다른 나인 '평행자아'가 아닐까? 나와 다른 선택을 하고 살아가는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말이다. 이 쪽 세상에서는 그저 뇌피셜, 행복 회로 등으로 상상할 수밖에 없었던 다른 선택을 한 내 삶을 직접 볼 수 있는 것이다.
자, 실제로 평행자아를 만나서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평생 궁금해 왔던 그때 그 순간의 다른 선택을 했음을 확인했다. 그 이후 살아온 평행자아의 지금을 알아보면 나보다 나쁘거나 낫거나 둘 중 하나다. 그것을 확인한 후, 우린 어떤 마음일까. 나보다 나쁜 삶을 살아간다면 역시 내 선택이 옳았다며 안심하고 우쭐해할까? 나보다 좋은 삶을 살아간다면 그때 내 선택을 땅을 치고 후회하며 억울해할까? 어떤 경우든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겠다. 그런데 평행자아를 만났다고 해서, 내 선택에 대한 안심이나 후회를 했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다. 내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그대로다. 지난 선택에 의해 나는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선택을 해야 한다. 평행자아는 나보다 앞서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선택을 참고할 수 없다. 이미 지나간 내 선택에 대한 합리화 또는 자기만족을 위해 돌아보는 용도일 뿐이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평행자아를 만나보겠는가? 가끔 불확실한 선택 후에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평생 하고 있는 후회를 비슷한 내가 만든 더 큰 후회로 줄여 보기 위해? 사실 난 몹시 궁금하고 보고 싶다. 근데 한 번 만나고 나면 이 만남을 끊지 못할 것 같다. 마치 중독과 같아서 작은 선택이라도 하고 나면 계속 궁금해할 것 같다. 이곳의 삶은 달라지지 않는데도 저쪽의 삶에 매달려 있을 것 같다. 궁금해 죽겠지만 시작을 안 하는 쪽을 선택하고 싶기도 하다. 아예 '평행세계', '평행자아' 자체를 모르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내가 선택해서 읽은 이 책을 읽지 않는 것으로 결정한 내 삶으로 바꾸고 싶다.
나는 벌써 이것을 잊지 못하는 초기 중독 단계인 것 같다.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지는 모두 내게 달렸다. 그저 지금의 나에게 집중해서 온전히 내 삶을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내 것이 아닌 나와 비슷한 다른 삶을 기웃거리며 의존하며 살아갈 것인지. 솔깃하고 있는 당신은 우선 매혹적인 이 책을 읽은 뒤에 선택해도 늦지 않을 테다.
<숨> (테드 창) - 2021 완독
와... 이건 뭐라고 해야 할지... 이런 엄청난 소설을 한꺼번에 이렇게 읽어도 되나 싶다. 각 단편들마다 그 무게와 정성이 보통이 아니다. 작가는 천재이며 천재 작가다.
배경지식이 더 풍부하면 보다 풍성하게 즐길 수 있었을 테지만 백지상태로 즐겨도 무방할 만큼 재밌고 쉽게 쓰이고 읽히는 소설이다. 개인 차는 있을 수 있다. 논리적으로 흐름을 따라가면서 내가 지금 어디쯤에 와있는지 확인하며 나아가야 하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를 놓치면 이게 뭔가 싶은 상태로 끝날 수 있다.
전체적인 느낌이나 각 단편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그저 강력 추천이다. 소설을 좋아하든, SF소설을 좋아하든 상관없이 읽는 것을 즐긴다면 누구나 행복하게 빠져들 수 있는 걸작이다. 이 위대한 작가가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에 무척이나 감사하다.
삐딱한 표지 사진 한 장 없는 서평을 고집스럽게 쓰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