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격
비가 내리는 오후였다. 안개가 짙게 깔리고 있어서 어둠이 닥치면 주위의 모습이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한 방울씩 내리던 비는 조금씩 굵어지더니 쏟아질 듯이 내린다. 빗소리가 항아리를 두드리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폭우 속에 선우의 부모님들은 밖에 나갈 채비를 한다. 둘이 한꺼번에 자리를 비우는 일은 드물었기 때문에 선우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비 오는데 나가는 거야?"
"응…아무 데도 가지 말고 문 꼭 잠그고 안에 있어."
누구라도 올 것처럼 말하지만, 인기척조차 없는 산속에서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나 물어볼까 하다가 선우는 그만두었다. 서둘러 나가는 그들은 다시 한번 강조하였다.
"밖에 나오지 말고 집 안에 있어. 알았어? 우리가 올 때까지 누구에게도 문을 열어줘서는 안 돼. 아예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하고 있어. 그리고."
"알아, 목걸이 안 빼. 그런데 꼭 가야 해? 비가 이렇게 오잖아. 나중에 가."
"그럴 일이 있어… 금방 다녀올게."
교과서를 사러 가거나, 새로운 책들을 구입하러 가기 위한 얼굴보다는 하얗게 질린 얼굴들이었다. 책 속에서 읽었던 깜짝 파티를 위한 연기로도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갈 수 없었던 선우는 닫히는 문을 바라본다.
친구를 사귀고 싶었다. 왜 밖으로 못 나가는지, 항상 이 산속에만 존재해야 하는지 선우는 알 수가 없었다. 그 이유라도 물어볼라치면, 매섭게 눈을 뜨고는 다시는 그런 말을 언급도 하지 말라는 어조로 묵살당하곤 했다.
문을 열지 말라고 했지만, 갑자기 마음이 답답해져 문을 열아 본다. 갑자기 텃밭에 심어 놓은 토마토가 걱정이 되어 우산을 들고나가는데, 텃밭으로 가는 길목에 한 여자아이가 서있었다. 머리를 길게 내려뜨린 선우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은 아이가.
아이는, 아니 그 보다 사람을 만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선우는 눈이 커다래진다. 그 여자아이는 한 걸음씩 선우에게 다가왔다. 그 여자아이는 왜인지 선우보다는 선우의 목걸이에 눈이 고정되어 있었다.
"안녕? “
“어… 안녕?”
“네 이름은 뭐야? “
"나는 선우야."
"선우구나. 반가워."
"넌 누구야? 사람 맞지?"
빗소리가 나는 토마토 텃밭 근처에서 그녀가 미소를 지어 보인다.
"응. 사람이야."
"아… 미안… 여기서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나도 마찬가지야. 그러니 너랑 내가 오늘 만난 건 우리끼리의 비밀로 하자."
"왜?"
"네가 비밀을 지켜주면 다음에 만날 때 내 이름을 알려줄게."
"음… 알았어."
그 뒤로, 그녀의 이름은 현수라는 걸 알게 되었고, 여자 아이로 보였지만, 남자아이였다는 사실도 알게 된 선우는 자신들만의 비밀이 생긴 것 같아 부모님에게 미안하기도 했지만, 이 만남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도 만나보고 싶었던 선우는 다른 아이들이랑 다 같이 만날 수 있냐고 현수에게 물어보았다.
"아직은 안돼. 그런데 만나게 될 거야."
"언제?"
"때가 되면."
15세가 되자, 부모님 두 분이 한꺼번에 외출하는 일이 잦아지고, 그럴 때면 어디선가 나타난 현수를 만났다. 생일이 되면 현수가 가져온 가발과 옷을 바꿔 입고 도시로도 나가보았다. 그곳은 선우가 살던 곳과는 매우 달랐다. 맛있는 냄새가 났고, 시끄러웠지만, 사람이 많았다. 처음에는 낯설어서 현수의 옷자락을 꼭 잡고 있어야만 했지만, 선우는 현수와 함께 걷는 게 즐거웠다.
19세가 되는 선우의 생일날, 현수가 보이지 않았다. 부모님들은 일찍이 케이크라도 사 오겠다며 나간 상태였고, 보통 때의 현수라면 금세 나타났어야 했다. 현수가 걱정되기도 해서 혼자서 시내로 나갔다.
현수가 없는 시내는 여전히 시끄럽고 번화했으며, 매력적이었지만 처음 걷는 길처럼 혼란스러웠다. 현수가 어디 있을지 알 수도 없는데 무작정 밖으로 나온 선우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자책했다.
‘일단 돌아가자.’
길을 걷다가 막다른 골목 쪽으로 나와서 돌아가려는데 반대편에서 누군가 얻어맞는 소리가 들렸다. 선우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선우의 인기척을 느낀 깡패들은 선우에게로 다가오며 위아래를 훑었다.
"목걸이 내놔."
"이건… 안 돼요."
“…”
깡패는 씩 웃는가 싶더니 선우의 목을 쥐고는 비틀더니 목걸이를 낚아채버렸다. 세상이 돌기 시작하더니 짙은 암흑이 가라앉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