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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정 Nov 12. 2024

나의 이름은 불안

오직 나만이 나의 이름을 바꿀 수 있다

갑자기 날아온 축구공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이었다. 나는 세희의 카톡에 올라온 웨딩 사진을 한참이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파혼한 애인의 (이렇게나 빠른) 결혼에  면 없었다. 충격을 넘어 세계가 송두리째 흔들렸다. 그간 나를 지탱해 온 현실 부정과 희박한 기대가 남김없이 빠져나갔다. 나는 거대한 상실을 경험했고 동시에 아주 빠르고 순응적인 체념을 느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세희는 내게 금지된 사람이 되었고 세희와 나의 세상은 온전하게 종결되었다. 웨딩 사진 속 남자와 세희는 이제 내가 상상수도 없고 엄두도 낼 수도 없는 가장 내밀하고 단단한 끈으로 묶여 있었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세희에게 아무것도 아닌 남 무리되었 것이었다. 밀린 진도를 한 번에 받아들이려니 차가운 겨울 공기를 갑자기 들이마시는 것처럼 폐부가 찢겨나갔.


그때 세희가 내게 청첩장을 보냈다.


'위약금 신경 써  것 고마웠어. 그렇게까지 보내주지 않아도 됐는데...

오빠, 결혼이라는 거 있잖아, 하려고 하니 참 순식간이더라.'




회사 이전 사업 때문에 김해경의 출장이 잦아졌다. 나는 차라리 그가 집을 비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김해 이렇게까지 닥인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참함을 넘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허덕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이 암전과 비통과 질투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김해경은 세희의 청첩장을 진작에 눈치챘지만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영 개자식은 아니었다.


"집 잘 지켜요, 이 대리." 김해경이 넥타이를 매며 말했다.

"도둑 들." 내가 힘없이 물었다.

"이 집에서 뭘 훔쳐가야 할 정도의 인간이면 좀 줘도 되지 않겠습니까?" 김해경이 출장 가방을 들며 말했다.

"출장 가는데 또 기차예? 차는요?" 내가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산악 지대를 달리는 승용차는 그저 고라니를 치기 위한 용도일 뿐입니다. 내가 묵는 허허벌판인 숙소 앞에 편의점이 딱 하나 있습니다. 거기 CU 사장은 고라니에 대해 얘기하라고 하면 국회 필리버스터 기록을 갈아치울 수 있는 사람이에요." 김해경이 현관으로 나서며 말했다.

"잠깐만요, 과장님." 내가 다급하게 김해경을 불렀다.


김해경이 정장 차림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거실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정신 건강이 안 좋을 때는 노동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김해경이 담담하게 말했다. "다음 주에 봅시다."




김해경이 집을 비운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는 방 안에 홀있었다. 나는 벽지의 얼룩처럼 혼자였다. 지긋지긋한 고독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나는 깨어있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후회로 보냈다. 데일 것 같은 질투를 느꼈고, 결혼에 실패할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서른이 다 된 나이에 집도 없이 남에게 얹혀살고 있는 현실을 자각하니 물 속에 있는 것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평범한 패배자로 끝장이 나는 중이었다. 처참한 통장과 하찮은 회사가 내 실패의 증거였다. 끝내 이루지 못한 꿈을 생각하면 비명을 지르고 싶어졌다. 나의 생이 무위하다는 무력감이 들었고, 맹렬한 자기 파괴의 을 느꼈다. 무수한 불면의 밤과 지옥 같은 불안의 낮이 반복되었다.


김해경과 윤세희가 없는 서울의 가을은 기이하게 따뜻했다. 햇볕이 너그러워지고 하늘이 푸르러질수록 내 안은 회색처럼 어지러워졌다. 


더는 회복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갔을 때 나는 갑자기 김해경의 말을 떠올리고 벼락처럼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무엇을 써야 하는지도 모른 채 모든 것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노동, 온몸이 젖을 정도의 노동이 필요했다.


소란과 분란, 혼란이 그쳤다. 4B 연필로 마구 그어놓은 것 같은 괴로움이 백설기처럼 태연해졌다. 나의 모든 것이 그저 다음 문장을 만들어 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순간 나는 내가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웠는지 기억해 내기 위해 잠시 손가락을 멈추었다.


그때 내 안에서 어떤 깨달음이 섭게 파도.


지나갈 것이다.

이 모든 고통이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아무런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다.

가끔은 그 상처를 반추하고 싶어 오늘을 더듬어 볼 정도로 소멸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아무것도,

진정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나의 이름은 불안이며 오직 나만이 나의 이름을 바꿀 수 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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