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날아온 축구공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세희의 카톡에 올라온 웨딩 사진을 한참이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파혼한 애인의 (이렇게나 빠른) 결혼에 어떤 면역력도 없었다. 충격을 넘어 세계가 송두리째 흔들렸다. 그간 나를 지탱해 온 현실 부정과 희박한 기대가 남김없이 빠져나갔다. 나는 거대한 상실을 경험했고 동시에 아주 빠르고 순응적인 체념을 느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세희는 내게 금지된 사람이 되었고 세희와나의 세상은온전하게 종결되었다. 웨딩 사진 속 남자와 세희는 이제 내가 상상할 수도 없고 엄두도 낼 수도 없는 가장 내밀하고 단단한 끈으로 묶여 있었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세희에게 아무것도 아닌 남자로마무리되었던 것이었다. 밀린 진도를 한 번에 받아들이려니 차가운 겨울 공기를 갑자기 들이마시는 것처럼 폐부가 찢겨나갔다.
그때 세희가 내게 청첩장을 보냈다.
'위약금 신경 써 준 것 고마웠어. 그렇게까지 보내주지 않아도 됐는데...
오빠, 결혼이라는 거 있잖아, 하려고 하니 참 순식간이더라.'
회사 이전 사업 때문에김해경의 출장이 잦아졌다.나는 차라리 그가 집을 비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김해경에게 이렇게까지바닥인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비참함을 넘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허덕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이 암전과 비통과 질투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김해경은 세희의 청첩장을 진작에 눈치챘지만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영 개자식은 아니었다.
"집 잘 지켜요, 이 대리." 김해경이 넥타이를 매며 말했다.
"도둑 들면요." 내가 힘없이 물었다.
"이 집에서 뭘 훔쳐가야 할 정도의 인간이면 좀 줘도 되지 않겠습니까?" 김해경이 출장 가방을 들며 말했다.
"출장 가는데 또 기차예요? 차는요?" 내가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산악 지대를 달리는 승용차는 그저 고라니를 치기 위한 용도일 뿐입니다. 내가 묵는 허허벌판인 숙소 앞에 편의점이 딱 하나 있습니다. 거기 CU사장은 고라니에 대해 얘기하라고 하면국회 필리버스터 기록을 갈아치울 수 있는 사람이에요." 김해경이 현관으로 나서며 말했다.
"잠깐만요, 과장님." 내가 다급하게 김해경을 불렀다.
김해경이 정장 차림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거실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정신 건강이 안 좋을 때는 노동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김해경이 담담하게 말했다. "다음 주에 봅시다."
김해경이 집을 비운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는 방 안에 홀로 있었다.나는 벽지의 얼룩처럼 혼자였다.지긋지긋한고독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나는 깨어있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후회로 보냈다.데일 것 같은 질투를 느꼈고, 결혼에 실패할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서른이 다 된 나이에 집도 없이 남에게 얹혀살고 있는 현실을 자각하니 물 속에 있는 것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평범한 패배자로 끝장이 나는 중이었다. 처참한 통장과 하찮은 회사가 내 실패의 증거였다. 끝내 이루지 못한 꿈을 생각하면 비명을 지르고 싶어졌다. 나의 생이 무위하다는 무력감이 들었고, 맹렬한 자기파괴의 충동을 느꼈다.무수한 불면의 밤과 지옥 같은 불안의 낮이 반복되었다.
김해경과 윤세희가 없는 서울의 가을은 기이하게 따뜻했다. 햇볕이 너그러워지고 하늘이 푸르러질수록 내 안은 회색처럼 어지러워졌다.
더는 회복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갔을 때 나는 갑자기 김해경의 말을 떠올리고 벼락처럼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무엇을 써야 하는지도 모른 채 모든 것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노동, 온몸이 젖을 정도의 노동이 필요했다.
갑자기 소란과 분란, 혼란이 그쳤다. 4B 연필로 마구 그어놓은 것 같은 괴로움이 백설기처럼 태연해졌다. 나의 모든 것이 그저 다음 문장을 만들어 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순간 나는 내가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웠는지 기억해 내기 위해 잠시 손가락을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