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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의 온도 Sep 23. 2022

먹을수록 살이 빠지는 병



고3 때 ‘공부의 맛’을 뒤늦게 알고, 대학교에 가고 싶어 졌다.

수학은 정말 싫었지만 언어에는 관심이 있어 선택한 게 바로 중국어다.

1학년 입학 후 전공과목은 달랑 2개, 교양과목이 더 많았던 나는 집에서 가까운 캠퍼스에서 주 2일 교양수업을 들었고, 주 2회만 본캠퍼스에서 수업을 들었다.

존재감 없던 시절, 고등학교 때만큼은 아니지만 공부만 하며 보낸 시간들...

그리고 1학년이 끝날 무렵 운 좋게도 4등 안에 들어 교직이수의 기회도 얻게 되었다.

전공과목이 많아지는 2학년, 주 4일 매일 왕복 3시간을 통학했다.

나머지 3일은 엄마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교통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그리고 2학년 1학기 마지막 기말고사가 끝나고 성적확인 날. 8과목, 20학점.



‘All A+이다.’


이 성적을 얻으려 노는 걸 참았을까, 아니다 공부하는 동안에도 정말 행복했다.

하고 싶은 공부만 할 수 있다는 게 설레었고, 알아가는 과정의 성취감도 있었다.




“2학기 전액 장학금은 대체 누가 탄 거야?”



 한 학년에 1명만 탈 수 있다. 전액 장학금. 등록금 전액 면제다.

그렇게 존재감 없던 내가, 고등학교 때까지 공부 잘한다 소리 한번 못 들어본 내가,

어느 순간 ‘공부 잘하는 애’가 되어있었다.


공부 잘한다는 이미지가 나를 힘들게 한 걸까? 너무 욕심을 낸 탓일까?

2학년 2학기, 나는 무리하게 21학점을 4일 동안 꾸역꾸역 들었다.

나름 즐기며 다닌다고 생각하며, 성취욕에 흠뻑 빠져 있었다.





‘아이고 형님, 이렇게 내쫓으시면 저희 식구들은 어떻게 살라는 말씀이십니까.’


2학년 2학기에는 매년 중국어과 학술제가 열린다. 조를 이루어 노래, 연극 등의 공연을 하는데(물론, 중국어로도 해야 한다), 연극은 성적으로 이어진다. 나는 ‘흥부와 놀부’에서 흥부를 맡았다.


그리고 그 무렵 나는 항상 배가 고팠었다.


“요즘 왜 이렇게 잘 먹어?”

“몰라, 수업도 많고, 학술제 준비도 바쁘고 그래서 그런 가? 먹어도 먹어도 계속 배가 고프네.”

“그래? 살은 빠진 것 같은데...”

“힘들어서 그런 가 보지 뭐, 그만큼 에너지를 쓰나 봐.”

엄마 가게가 끝나는 새벽 2시, 오늘도 우린 자주 가는 삼겹살집으로 향했다.



하루는 학술제 연습이 끝나고 늦은 저녁을 다 같이 먹으러 닭갈비집으로 향했다.

닭갈비를 잔뜩 먹어 놓고, 나오자마자, 아이스 초코를 사 먹었다.


“배 안 불러?”

“응. 나 왜 배고프지.”


그렇게 먹고 고칼로리의 디저트를 먹는 나에게 친구들은 그저 많이 먹어도 살 안 쪄서 좋겠다며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난 늦은 저녁 집으로 향하는 학교버스에 올랐다.


‘증평입니다. 내리세요.’


아직이다, 내리려면 30분은 더 가야 한다. 그런데 참을 수가 없었다.

서둘러 내려 근처 커피숍의 화장실로 들어갔다.


‘요즘 왜 이렇게 화장실을 자주 가지….’


화장실 때문에 차에서 내린 적은 처음이었다.

결국 학교버스를 보낸 나는 시내버스를 타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아... 왜 또 배가 고프지 분명히 많이 먹었는데...’


저녁으로 닭갈비를 푸짐하게 먹고, 아이스 초코까지 먹은 지 1시간이 막 지났을 무렵이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길, 결국 아이스크림가게에서 초코 셰이크를 하나 더 사 먹었다.

그리곤 커다란 수박 한 통과 가장 큰 콜라 한 병까지 사 들고 나서야 비로소 집에 도착했다.


그날 새벽에도 나는 수시로 일어나 화장실을 갔고, 콜라를 마시길 반복했다.

아니, 며칠 동안이나 이 행동은 반복되었다.


.

.



‘46kg...?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이상했다. 분명 넘치도록 많이 먹었는데, 되려 체중은 7kg가 넘게 빠져버렸다.

살이 빠져 마냥 좋았던 시간이 지나고 불안감이 엄습했을쯤이었다.



“수경아, 언니한테 좀 다녀와야겠다.”

“왜요, 엄마?”

“언니가 엄마카드로 50만 원을 긁었는데, 강아지를 샀댄다. 못살아 정말.”

“뭐라고요? 엄마 내가 다녀올게, 잘 설득하고 올게요.”



‘못 살겠다 정말.’


언니가 대전으로 대학교를 가고 자취를 하며, 엄마와 떨어져 있어서 근 2년은 조용했던 우리집이다.

나는 곧장 대전에 있는 언니에게로 향했다.



‘끼잉끼잉...’


작은 자취방 한 켠, 울타리 안에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조그만 갈색 푸들 한 마리가 있었다.

졸업을 앞두고 간호사 국가고시를 준비하고 있던 언니의 스트레스가 불러온 일이었다.

다짜고짜 언니에게 제정신이냐고 했지만, 언니 표정을 보니 혼자 많이 힘들었던 것 같다.


“방안에 하루 종일 혼자 있을 강아지가 불쌍하지도 않아?”


어차피 국시를 준비해야 하는 언니는 도서관에서 종일 공부하는 게 일상이었고, 강아지는 잠깐이었을 거다.

그리고 나중에 책임지지 못할 거라면 처음부터 키우지 말아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언니가 국시를 마치면 다시 본가로 들어오게 되어 같이 살게 될 텐데... 다들 바빠서 아마 결국 강아지는 엄마가 키우게 되겠지, 이미 우리를 키우느라 질렸을 엄마에게 강아지까지 키워 달라고 할 수는 없다.


다행히도, 언니는 울며 겨자 먹기로 설득당해주었고, 강아지도, 엄마 카드 값 50만 원도 모두 제자리를 찾아갔다.




“근데 못 본 새에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

“몰라, 요새 많이 먹는데도 자꾸 살이 빠지네, 공부하고 일하고 너무 스트레스받았나? 아, 가끔 눈도 흐릿하고 잘 안 보여 나 원래 시력 좋은데… 방학되면 좀 나아지겠지 뭐.”

“어디 갑상선 쪽이 안 좋은가? 그래도 너무 빠졌는데? 병원에 좀 가봐.”



간호학을 전공한 언니는 병원에 가보라며 재촉했지만, 나는 한편으론 두려우면서도 괜찮겠지 싶었다.

그때의 나는 이미 볼품없이 말라 있었고, 가려움증으로 사타구니 안쪽 살은 까맣게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갑작스러운 출혈까지, 한계점에 다다랗던 나의 몸이 보내는 신호였을까?


내분비내과 전화를 받은 그날의 오후의 벨소리.

눈치 없는 주인에게 지칠 대로 지친 몸이 보내는 마지막 경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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