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신관

러시아의 천재들

by 손봉기

20세기 이후 러시아 화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이곳에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모더니즘 화가인 말레비치와 샤갈 그리고 칸딘스키 등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먼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샤갈의 작품부터 감상하자.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알려진 이 작품에서 두 남녀가 러시아 정교회 성당과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도시 위를 날고 있다. 그들은 현실의 고된 삶을 잠시 잊고 행복한 순간 속에 머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 속 남녀는 샤갈 본인과 사랑하는 자신의 아내인 벨라이다. 샤갈은 오직 벨라를 통해서만 사랑을 느끼고 행동하며 또한 그림을 그렸다고 고백했을 만큼 아내를 사랑했다.

그래서 비현실적인 이 작품에서 현실보다 더 진한 아내에 대한 사랑과 낭만이 느껴진다.


러시아 농촌에서 태어난 샤갈은 유대인이었다. 어릴 때부터 예술적 재능을 인정받은 그는 미술학교를 다녔으며 성인이 되자 본격적인 화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왔다. 샤갈이 파리에 왔을 때는 야수파와 입체파가 파리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영향을 받으며 자신이 세계로 한발 한발 나아갔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자신의 연인이었던 벨라와 결혼하였다.


벨라는 러시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부자인 부모를 두었는데 이 엄청난 부는 유대인에 대한 핍박도 피해 갈 정도였다. 벨라는 부유한 가정환경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명품 교육을 받았으며 18살의 나이에 세계적 명문인 모스크바대학에 들어갔을 만큼 똑똑했다. 그야말로 풍부한 교양과 지성을 갖춘 매력 넘치는 여인이었다.그녀는 샤갈이 파리로 유학을 떠난 뒤에도 6년을 기다렸으며 샤갈이 고국에 돌아온 직후 결혼했다. 이후 벨라와의 사랑은 샤갈의 작품들을 빛내는 소재이자 모티브였다.


1944년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피신해 있는 동안 벨라는 바이러스 감염으로 사망한다. 아내를 잃은 샤갈은 깊은 슬픔과 외로움으로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하였다. 이후 샤갈은 니스에서 99살까지 살았다.


다음으로 추상주의의 대표적인 화가인 칸딘스키의 작품을 감상하자.



이 작품은 10개의 구성 시리즈 중 7번째 작품이다. 칸딘스키가 이 작품을 완성하기 전에 여러 차례의 습작을 거쳤기 때문에 실제 그림을 그린 기간은 3일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칸딘스키는 화면 중앙의 왼쪽 부분에서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두껍게 바른 물감과 옅은 물감을 번갈아 사용하였으며 작업이 중앙에 오자 겹겹이 바른 원색 물감들을 이용해 솟아나는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또한 작품의 모티프였던 왼쪽 바닥의 보트는 그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추상적으로 표현하였다.

칸딘스키는 물질세계 속에 병든 이들을 치유하는 영적인 예술을 창조하고 싶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관람자로 하여금 그림 속을 떠돌아다니게 하고
그래서 아예 그림의 일부가 되게 만드는
그런 그림들을 그리고 싶다.



<구성 7>은 <구성 6>의 무서울 만큼 파괴적인 홍수의 모습과는 다르게 기쁨과 무질서를 함께 지닌 존재의 재탄생을 노래하고 있다. 그것은 당시 1차 세계대전의 폭력에 맞선 희망의 외침이었다.


다음은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을 감상하자.


말레비치의 작품을 감상하기 전에 보다 즐거운 작품 감상을 위해 아주 잠시 미술사를 돌아보자.


예술의 암흑기인 중세를 지나자 본격적인 미술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미술 작품을 구매하고 즐기는 사람이 이전의 왕과 종교 세력에서 돈이 많은 상인들까지 합세했다. 거부의 상인들로부터 르네상스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으며 르네상스 미술이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이었다. 그리고 인간의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을 위해서 원근법과 명암법을 이용한 입체적인 미술이 나왔다.


시간이 흘러 19세기 프랑스혁명을 계기로 예술품의 구매자뿐만 아니러 국가의 주인이 왕과 종교 세력에서 시민으로 바뀌었다. 새로운 시대의 주인이 된 시민들은 자신들에 맞는 평등하면서 새로운 예술을 원했다.




그들은 이전의 왕과 종교 세력이 자랑하던 온갖 장식이 있는 화려하면서 입체적인 미술과 건축을 버리고 보통의 시민들을 대변하는 장식성이 배제된 단순한 미술과 건축을 원했다.



그래서 화려한 왕궁이나 성당 대신 단순하면서 세련된 집과 공공건물을 지었다. 이는 유리와 강철이 생산되면서 빌딩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경향은 미술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시민을 위한 미술은 왕과 종교 세력을 위한 미술 작품에서 보였던 거추장스러우면서도 화려한 장식을 위해 사용했던 원근법과 명암법을 없애기 시작했다.



모더니즘은 원근법과 명암법을 제거하면서 가식적인 입체성에서 벗어나 심플한 평면으로 나아갔으며 그 과정에서 아름다움의 기준이 바뀌었다. 단순하면서 세련된 이미지가 현대적인 아름다움이 되었다. 그래서 나온 미술 양식이 미니멀리즘이다. 미니멀리즘은 평면성과 단순함을 추구하며 우리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미니멀리즘은 단번에 나오지 않았다. 수많은 화가들의 시도와 실험의 결과물이었다. 기존의 사물을 모방하며 입체감을 가진 그림을 포기하고 처음으로 평면적인 그림을 그린 화가들은 인상파 화가들이었다. 그들로부터 거추장스러운 명암법과 원근법은 없어졌으며 그림 자체의 평면성으로 나아갔다.



이후 그들은 형태와 색 자체에 자신의 이성과 감정을 담았다. 그들이 우리가 잘 아는 모네와 고흐였으며 이는 피카소와 마티스로 이어진다.



이후 본격적으로 단순하면서 평면적인 현대미술로 나아간 화가가 러시아의 말레비치였다. 그는 미술에 있어서 화려한 장식은 물론 그 안에 담긴 이야기나 주제마저 포기하는 추상적인 미술을 추구하였다. 그가 활동했던 당시 러시아는 1918년 공산주의 혁명을 막 끝내고 트로츠키와 레닌 그리고 스탈린 등이 평등한 국가를 구상하고 있었던 시대였다.


러시아의 예술가들 역시 과거의 왕과 종교를 위한 화려한 예술을 버리고 시민을 위한 평등하고 진보적인 예술을 추구했다. 이들이 추구한 예술이 20세기 현대 디자인의 표본을 제시하면서 이후 미국에 등장하는 미니멀리즘에 영향을 주었다. 나탈리아 곤차 노바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이제 러시아 예술은 절정에 이르렀으며 현재 전 세계에서 주역으로 활약하고 있다.
동시대 서양의 미술은 우리에게 무용지물이다.



당시 러시아에서 대중을 위해 새로운 예술을 추구한 말레비치가 그린 흰색 바탕에 단순한 검은 사각형은 예술사에서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작품이었다.


1915년 말레비치는 그가 맡은 오페라의 무대를 장식하기 위해서 흰 천에 검은 사각형을 그렸다. 이때만 해도 그는 자신의 창조한 작품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다.하지만 두 번째 오페라 무대에서 자신의 작품이 지닌 힘을 깨달았다. 그는 당시 오페라 연출가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승리하는 장면을 위해 내가 고안한 커튼 디자인을
적절한 곳에 배치해주면 정말 좋겠네.

회화의 관점에서 내 작품은 엄청나게 중요한
그림이 될 것이네.


여기서 말하는 엄청나게 중요한 그림이란 순수하고 독창적인 예술 표현 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후에 사람들은 이를 절대주의라고 불렀다.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흰색 배경위에 검은 사각형이 놓여 있다. 작가는 작품의 주제를 암시하는 시각적 단서를 모두 없애 버림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순수한 감정만을 느끼도록 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이 작품을 각자의 감정대로 보고 느끼기를 바랐다. 흰색의 둘레와 가운데에 있는 검은 사각형 간의 관계 및 조화를 생각하든 단순히 물감의 질감을 즐기든 아무 상관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또한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작품 속에 검은색과 흰색의 긴장감이 관람자에게 역동감과 운동감을 전달하기를 바랐다. 말레비치는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하였다.그 이유는 이전의 예술이 그리려든 대상을 없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모든 것을 보고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제 그가 원하는 것은 미술 작품의 주제보다는 미술 감상자의 감정이었다. 그는 대중들이 미술 작품을 통해 그들 개개인이 가진 느낌과 개성을 스스로 파악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현대 미술의 주인공은 작품이나 작가가 아니라 대중 자신의 감정이라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이었다. 이는 이후 평면성과 평등 그리고 개인의 존엄성과 감정을 존중하는 현대 예술의 정신이 되었다.


그래도 사람들이 말레비치에게 자신의 작품에 대해 해석을 요구하자 그는 마지못해 자신의 감정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이 두 가지 색조로 그린 이 작품에서 빛과 어둠 그리고 삶과 죽음을 담고 있다. 또한 나의 적품에는 다른 절대주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틀이 없다. 그로 인해 흰색 배경이 자연스럽게 그림이 걸린 하얀 벽으로 이어져 무한함을 느끼게 한다. 이는 공간 속에 떠 있는 검은 사각형을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우주 속에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을 연상케 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미술관 로비에 전시되어 있는 타틀린의 <제3 인터내셔널 기념탑>을 감상하자.


말레비치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블라디미르 타틀린은 유리 철 구리 등을 모아 말레비치의 삭막한 회화보다 흥미롭고 강력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당시 회화의 형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화가는 캔버스를 버리고 화가가 그리려던 실재하는 사물로 예술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구성주의라고 불렀다.


구성주의자들은 날것 그대로의 재료가 가진 본질의 특성을 강조하고 드려내려고 하였다. 그 결과 캔버스와 물감 그리고 캔버스를 고정하는 나무틀 등이 예술작품의 일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타틀린은 예술에 있어서 말레비치처럼 추상적인 주장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에게 예술은 목적이 있어야 하며 만인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공산주의가 추구하는 유토피아적 이상을 사람들이 바로 알아볼 수 있는 있는 탑을 제작했다.



탑의 이름은 공산주의 국제본부라는 의미로 <제3 인터내셔널 기념탑>이라고 지었다.


그가 구상한 400m의 기념탑은 300m에 불과한 에펠탑보다 거대했으며 사람들의 눈에 가장 잘 띄는 상트페테부르크의 네바강 북쪽에 짓게끔 고안하였다. 작품을 자세히 관찰하면 끝이 뾰족하고 기울어진 탑은 60도 각도로 세계를 향해 뻗어 있다. 타틀린의 말에 의하며 탑 안의 아래에 있는 정육면체는 1년에 한 바퀴씩 회전하게 되어 있으며 그 위쪽의 정육면체는 한 달을 주기로 한 바퀴씩 회전하게 되어 있다.또한 원통형의 꼭대기 층에서는 전 세계를 향해 공산주의를 선전할 방송 안테나가 설치될 것이라 했다. 그리고 탑 전체는 매일 한 바퀴씩 돌아가도록 설계했다.


하지만 당시 소련은 전쟁과 경제난으로 이를 실현하지 못했으며 현재 미니어처 모조품만 미술관 로비에 덩그렇게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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