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보느리가 들려주는 로마네스크 예술 이야기 50화
시토회는 처음 결성되었을 당시부터 클뤼니 수도원의 자산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건물의 방만한 규모에 분명한 반대의사를 개진해왔습니다. 시토회는 이성적인 방법을 통하여 수도원들에 속한 건축물들을 완성하기를 희망했죠. 이성적인 방법이란 곧 엄격한 규율에 따른 것으로 금욕주의적이고도 가난함에 대한 절실함이 본심에서 우러나오는 발로여야 하며, 사제이자 수사들이 설교하는 내용 또한 그들의 성업으로부터 비롯한 신실함을 띤 아주 명쾌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가 1125년에 「기욤을 위한 옹호(Appologie à Guillaume)」에서 그의 친구인 샹파뉴 지방에 위치한 베네딕트 수도원장이었던 생 티에리에게 제안한 것으로 아주 혹독하면서도 엄격한 규칙을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벽안에서 빛을 발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가난함과는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교회는 돌로 지은 건물들로 이루어졌으나, 그 돌들의 벌거벗은 모습에 이르지는 못하였습니다.”
사실 시토회 수도원들의 초기 형태는 건축 상으로 아주 간소하며 조각은 물론 회화에 이르기까지 냉혹하리만큼 장식을 배제한 간결한 모습으로 이목을 집중하였습니다. 거의 건축 자재들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수수함과 간결함을 통해 건축적 완벽함에 이르렀음은 물론, 아울러 질서 정연한 건물 배치를 통해 우아함에 도달한 것 자체가 기존의 형식화되고 정형화된 건축적 아름다움과는 상반된 것이었기에 그 충격은 더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비올레 르 뒤크(Viollet le Duc)의 증언으로 더욱 확실하게 판명되었죠. 이 수도원 건축물의 복원가이자 건축가는 시토회의 건축 예술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예증해주고 있습니다. “본래의 목표에서 빗나간 방향으로 지어진 종교 건축물들의 난립은 수도원 학교들의 비약을 저해하고 억누르는 것에 불과했다”라는 그의 지적은 이에 대한 통렬한 자기반성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실 시토회 건축물들이 보여준 심미적 결과물은 12세기에 이루어진 예술적 정서와 충돌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띤 것이었습니다. 벌거벗은 돌이 주는 차가움뿐만 아니라 색상과 장식의 부재에 따른 생경함은 하느님의 궁전에 대한 아름다움을 오히려 비난하고 거부하는 것으로 비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입니다.
19세기에 와서 다시 한번 바로크의 겉치레 장식을 찬양하는 이들에 의해 시토회 건축술은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몽탈랑베흐에 따르면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종교 예술이 지닌 심미적인 특성에 대해 너무 가혹한 선입견을 갖고 대했다”라고 주장합니다.
실상 시토회 건축 예술은 적어도 베르나르(1153년 영면)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하찮고 쓸데없는 장식들로 건물을 꾸미거나 하지는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1119-1147년에 완공된 부르고뉴 지방에 위치한 홍뜨내 수도원에서 보듯 거의 헐벗다시피 한 건물의 외관을 보면 그와 같은 사실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기본 설계는 라틴십자가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대들보 기둥들 위에 올린 꺾인 통 형 천장을 하고 있고, 양쪽에 측랑을 끼고 있는 단 하나의 회중석 만을 갖추고 있습니다. 십자형 좌우 회랑 격인 트란셉트는 4 각형의 네모 반듯한 작은 후진들을 끼고 있지만 공간은 넘쳐납니다.
편평한 교회 후부에 자리한 후진은 커다란 창문들로 인해 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구조입니다. 기둥머리는 모서리를 둥글게 깎았으며, 장식이라고는 오직 물 이파리 장식뿐입니다.
정면 입구(파사드)는 수수하다 못해 초라하기까지 하죠. 두 줄로 난 창문들이 파사드 벽을 수놓고 있지만, 이 창문들 역시 몹시 절제된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킵니다.
건물의 엄격함은 안뜰에서도 묻어납니다. 참사회의실 뿐만 아니라 다른 건물들 역시 엄격함이 적용되었습니다. 벽들은 아무것도 장식되지 않은 벌거벗은 형태이며, 돌의 두께나 크기들은 매우 신중하게 돌들을 쌓아 올렸음을 입증해 줍니다.
기둥들 또한 어떠한 장식도 없습니다. 그저 기둥머리를 매끈하게 다듬은 정도로 단조롭게 늘어서 있습니다.
교회와 마찬가지로 수도원 경내 또한 어떠한 장식도 찾아볼 수 없는 아주 검소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두 개가 한 쌍을 이룬 기둥들이 늘어서 있는 아케이드들은 반원형 천장으로 정원을 향해 열려있습니다. 아케이드들은 물 이파리가 아주 단순한 형태로 조각된 기둥머리 위에 얹혀있으며 간결한 형태에 머물러있습니다.
시토회 건축을 증거 하는 또 다른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후진 동쪽 벽면에 자리한 3열로 나란히 설치된 창문들이 자주 목격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는 서쪽 파사드나 참사회에서 목격됩니다. 시토회 창문들은 한결 같이 유리 표면에 어떠한 색상도 입히지 않은 밋밋한 상태라는 점도 특별합니다.
중앙 회중석의 대들보 격인 아치를 지탱하고 있는 기둥들은 어느 높이에 이르면, 즉 까치박공이 있는 지점에 이르면 더 이상 높이로 올라서지 않습니다. 이러한 엄격한 건축상의 금지규정들은 결국 종탑들마저 눈에 잘 띄지 않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두 개의 종탑들은 나무틀 형태로 제작했는데, 일정하게 규격화한 것들입니다. 더군다나 홍후롸드(Fontfroide)에서 보듯, 피라미드 형태의 지붕으로 덮인 작은 종루 모양을 보여주기까지 합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건축적 절제나 검소함은 건축적 구성요소들에 의해 유연해지는 현상을 보입니다. 그럼으로써 본래의 평이했던 교회 후진의 소박함은 사라지고 대신 거창한 건축물들에 자리를 내줍니다. 이는 내진의 기다란 측면 복도들을 설치할 필요성이 대두된 결과에 따른 것이며, 또한 그 자리에 제단들이 반드시 들어서야 한다는 절박감에 따른 것이기도 합니다. 이는 현실화되어 독일이나 영국 등지에서 변화를 보입니다.
주제단이 있는 내진은 꾸데(길이를 나타내는 단위)로 나뉜 순환형 회랑이 둘러싸게 됩니다. 회랑 저 너머로는 후진이 자리하고 있죠. 그와 같은 경우에 속하는 수도원이 모리몽(Morimond), 퐁티니(Pontigny) 그리고 클레르보(Clairvaux) 수도원입니다.
순환형 회랑은 포블레(Poblet)에서는 절반으로 줄어들기도 합니다. 주로 영국에서 발견되는 경우에 속하지만 종탑들은 위압적인 높이로 들어섭니다. 종탑은 트란셉트가 교차하는 지점에 세워졌죠. 이는 영국과 노르망디 왕국을 동시에 지배했던 앵글로 노르망디 인들의 솜씨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시토회 건축물들은 도처에서 고딕의 호화로움에 묻혀가고 맙니다. 시토회 종탑들 역시 고딕 건축의 호사스러움에 희생당하기 전까지 카탈루냐 지방에 위치한 산테스 크레우스(Santes Creus) 수도원 경내에 서 있는 종탑으로 화려한 정점을 이룰 따름입니다.
세낭끄의 노트르담 수도원 교회 후진을 찬찬히 살펴보면, 일렬로 나란히 자리 잡은 똑같은 크기의 3개의 창문을 통하여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은 내진 안에 자리 잡은 후진을 환하게 비춰줍니다. 트란셉트가 서로 교차하는 한가운데 지붕을 뚫고 솟아오르는 종탑은 절제된 수수함의 극치에 가깝습니다. 이 모두가 시토회 건축물의 특징들입니다. 창 상부에 미세하게 돋을새김으로 아치를 장식했을 뿐, 그 어디에서도 화려한 구석은 보이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