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이야기
오늘은 오이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한다. 나는 오이를 못 먹는다. 오이가 풍기는 그 특유의 향은 내가 오이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한다. 사실 오이를 먹고 두드러기 반응이 올라오거나, 몸이 간지러워지는 알레르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내가 오이를 못 먹는 건지 늘 의문이었다. 한 번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장모님께서 오이 못 먹는 것을 고쳐주시겠다며 커다란 오이를,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아주 정성스럽게 깎아서 내 앞에 주셨다. 당연히 오이 건너편에는 장인어른도 보고 계셨다. 그때 이미 난 오이 향에 반절은 지고 들어갔다. 왜 나는 장모님 장인어른 앞에서 오이 잘 먹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을까?
"아, 장모님께서 주시는 거면 저는 다 먹죠! 자, 오이 들어갑니다이~"
오이 한입 물고 그대로 화장실로 가서 구역질을 했다. 한 입도 넘볼 수 없는 오이가 그날따라 더 미웠다. 내가 오이를 못 먹기 때문에 김밥이 먹고 싶을 때면 늘 오이 대신 우엉을 넣는 김밥집을 찾는다. 그리고 우엉을 넣는 그 김밥집은 나에게 맛집이 되고 만다. 오이를 넣지 않고 우엉을 넣어 만든 김밥을 하나 입에 넣으면, 그 김밥 안에는 우엉과 함께 오이 못 먹는 이를 위한 사장님의 배려, 오이를 빼고 김밥을 싸겠다는 사장님의 용기, 그리고 '우엉 넣은 김밥 찾기가 힘들었지~?' 하는 사장님의 따스한 위로까지 함께 말아진 김밥을 먹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쩌다 오이가 들어간 김밥을 먹게 될 때면 나무젓가락으로 김밥을 집을 때 오이만 콕 집어 남겨놓고 김밥을 먹는 기술을 발휘한다. 아버지는 꼭 나에게 군대에 가면 너 오이 못 먹는 병은 꼭 고쳐질라고 말씀하셨다.
"너 임마, 거기 가면 얼마나 배고픈 줄 아냐? 오이가 아니라 오이 껍질까지 다 먹고 싶어 질 거다 자슥아"
군대에 갔다.
'아버지, 오이 못 먹는 거 고쳐지다면서요. 왜 저는 이리도 배가 고픈데 더운 여름날 점심특선으로 나온 이 오이냉채를 삼키지 못하냐고요.'
배가 고파 돌도 씹어먹을 군대에서도 오이에게 완패했었다. 어쩌다 사람들하고 못 먹는 음식을 주제로 이야기를 하다가 나처럼 오이 못 먹는 사람을 만나면 어찌나 반가운지, 오이로 인해 어려웠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해주기도 하고 오이가 들어간 음식을 가려내는 각자만의 노하우를 공유하기도 한다.
그러다 며칠 전, 엄마하고 통화하다가 내가 오이를 먹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되었다. 나는 7살이었을 때, 뇌수막염을 앓았다. 뇌조직을 둘러싸고 있는 얇은 막과 뇌 사이에 염증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그때의 기억은 척수에 맞는 주사가 무서워서 엄마, 아빠에게 살려달라고 소리치던 어린 내가 떠오른다. 뇌수막염은 구토증상을 유발하는데, 엄마 말로는 일주일 간 병원에 입원해 있을 당시에 구토를 많이 했었고, 그때부터 희한하게 오이를 먹지 못했다고 했다. 아마도 흰색 병동 안에서 느껴지는 불안감과 더불어 병원에서만 맡을 수 있었던 특유의 병원냄새가 오이 향과 비슷해서 그 향을 맡으면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것 같았다.
원인을 알았다고 해서 모두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보다. 대신 내 식판에 오이가 들어간 음식을 담지 못하는 나를 한층 더 이해하게 된 걸로 마음이 편안해진 것은 틀림없다. 아무튼, 지금도 어딘가에서 오이를 먹지 못하는 사람들의 연대가 아주 조금씩 커져가고 있으니, 용기를 가지고, 담대히 오이가 들어간 음식에 집게를 넣지 말고 다만, 힘내라고 말해주고 싶다.
Feat. 여름에 오이냉채 대신 수박화채가 있어 다행이고, 우엉 넣은 김밥은 우엉의 단맛이 김밥의 풍미를 더해주니 좋고, 그때 이후로 장모님께서 오이를 권하지 않으시니 뭐 그 또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