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입고 싶은 수영복을 입을 권리가 있다
“또 사?”
인스타그램에서 라세린 수영복 광고를 클릭하려는 찰나, 남편이 물었다.
“자꾸 광고가 떠서 구경하는 거야. 이 수영복 예쁘지?”
“그만 사. 수영복이 몇 개야?”
‘하나, 둘, 셋, 넷, 다섯….’
손가락을 접으며 세어보니 가지고 있는 수영복이 7개나 됐다. 주 5일 수영강습, 1일 자유수영을 꼬박 다 나가도 다 못 입을 만큼 수영복이 많다니. 나는 수영이 좋아서 자꾸 수영복을 사는 것인지, 수영복이 좋아서 자꾸 수영을 하러 가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생각에 잠긴 내게 남편이 일침을 날렸다.
“수영복 살 돈을 모아서 겨울 코트를 사는 게 어때?”
일리 있는 말이었다. 수영복 한 벌에 5만 원에서 10만 원은 하니까 코트 한 벌은 사고도 남을 수도 있다. 게다가 올겨울은 유난히 춥다는데. 남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수영복에서 눈을 떼지 못 한 채 생각했다. 오로라그린을 살까. 오로라 핑크를 살까. 20% 세일해서 47,200원이면 저렴한 편인데…
그로부터 며칠 후 라세린으로부터 이런 알림톡을 받았다.
'우*경님, 주문하신 상품이 배송 중이에요.'
내가 봐도 요즘의 나는 육지옷은 안 사고 수영복만 사는 것 같다. (아, 육지옷은 요가복만 사고 있다. 이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얼마 전 크리스마스에도 스웨터 사 입을 생각은 못했지만, 산타 수모는 사서 수영장에 쓰고 갔다. 이왕 샀으니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마다 빨간 산타 수모를 쓰고 기분을 낼 생각이다.
이런 내게도 단벌 수영복 초급반 시절이 있었다. 수영을 하고 싶은데 수영복은 입기 싫었던 시기였다. 수영장에 요가복이나 야구복을 입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수영복을 사야만 했다. 하필 인생 최대의 몸무게를 경신한 때에 수영복을 사려니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검은색 수영복은 입기 싫은데, 초록색은 튀겠지? 무슨 색을 사야 배가 덜 나와 보일까? 브랜드마다 L사이즈도 엉덩이 둘레가 다르네. L사이즈도 작으면 XL를 사야 하나? 수영복이 꽉 끼면 보기 흉하지 않을까? 입다 보면 늘어날까? 달랑 수영복 한 장 장만하기 어찌나 어렵던지.
고민 끝에 나이키 수영복을 샀다. 나이키 스윔 앤서 솔리드 패스트백 탄탄이 빌런레드라는 어마어마하게 긴 이름의 수영복이었다. 이름은 빌런레드였지만 색은 가을 웜톤 자주색이었다. 수영복은 예뻤지만, 수영복을 입은 내 모습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운동과 꾸준히 담을 쌓고 살아온 40대의 몸이었다. 그 후로 일 년간 자주색 나이키 수영복만 주야장천 마르고 닳도록 입었다. 무슨 수영복을 입은 들 예쁠까 나를 무시하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자주 입다 보니 정말 수영복이 닳아서 새 수영복을 사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때마침 한 달간 여행에서 다녀와 수영강습을 신청하려고 할 때였다. 여행의 마지막 1주일은 칸쿤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배가 나와도 엉덩이가 커도 저마다 입고 싶은 색과 디자인의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그때 생각했다. 있는 그대로 내 몸을 사랑하자. 입고 싶은 수영복을 입자. 어차피 남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래도 내 몸이 싫으면 열심히 수영해서 내가 좋아할 수 있는 몸을 만들자고.
저녁수영 강습은 모두 마감되어 딱 한 자리 남은 주 3일(월, 수, 금) 7시 새벽수영을 시작하게 되었다. 저절로 공복운동이 될 것 같았다. 새벽에 일어나는 것도 낯선데, 난생처음 공복 운동이라니. 이런 생각을 한 내가 기특해서 새 수영복을 샀다. 흰색 끈이 돋보이는 크로스백 청록색 수영복으로. 다음 달에는 아예 매일 새벽 수영을 하기로 마음먹은 내가 기특해서 새 수영복을 샀다. 식물의 어린 싶을 닮은 밝은 초록색 U백 수영복으로. 새 수영복을 번갈아 입으며 5~7월 3달간 열심히 수영을 했다.
어느덧 새벽수영 3개월, 초급반 10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어설프지만 양팔 접영으로 25m 끝까지 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수영 선생님은 중급반으로 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초급반에 어울리는 수영복을 한 벌 더 사볼까? 그동안 단색 수영복만 입었으니, 이왕이면 패턴이 있는 수영복을 사야지. 이왕이면 내가 좋아하는 도트 무늬!
도트 무늬를 좋아한다. 대학 입학 후 처음 산 원피스도 도트 무늬였다. 지금도 옷장에는 일명 땡땡이라 불리는 폴카도트 원피스만 3벌 걸려있다. 물방울무늬 원피스 애호가답게 땡땡이 수영복 하나는 있어야 되지 않겠냐며 네이비색 바탕에 흰색 잔잔한 도트가 프린트된 수영복을 주문했다.
수영복이 도착한 날, 신이 나서 언박싱을 했다. 땡땡이 수영복은 예상대로 몹시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땡땡이 수모가 따라올 줄은 몰랐다. 어린이 수영단이 쓰면 딱 어울릴 법한 스판 땡땡이 수모였다. 남편에게 보여줬더니 이런 반응이 돌아왔다. “설마, 그걸 쓰고 수영장에 갈 건 아니지?”
한동안은 땡땡이 수영복에 흰색 수모를 쓰고 다녔다. 여름 성수기로 초급반 인원이 급증하며 갑자기 중급반에 오게 된 터라 쓰기가 더 망설여졌다. 내 눈에도 땡땡이 수모는 중급반이 쓰기엔 좀 유치해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불쑥 들었다. 좀 유치하면 어때. 다른 사람들은 빨강, 노랑, 형광색 수모도 쓰는데. 어차피 남들은 내가 뭘 입든 신경 쓰지 않아.
땡땡이 수영복에 땡땡이 수모를 쓰고 수영장에 들어간 다른 날과는 달랐다. 여느 때처럼 5분쯤 지각해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데, 중급반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수영을 하다 잠시 숨을 고르는 타임에는 다들 한 마디씩 했다.
“세상에 땡땡이 수모가 있어?”
“땡땡이 수영복이랑 깔맞춤 한 거야?”
“아우, 눈 아파.”
어린이 수영단 대하듯 내 머리를 쓰다듬는 사람도 있었다.
“너무 귀엽다.”
그날 이후 나는 땡땡이로 통한다. 누군가는 나를 점박이 언니라고도 불렀다. 땡땡이가 좋아서 땡땡이 수영복을 샀을 뿐이고, 땡땡이 수영복을 샀더니 땡땡이 수모가 따라와서 쓰고 갔을 뿐인데 수모로 관심을 받게 될 줄을 몰랐다. 후에 친해진 수친(수영 친구)은 수년간 수영장에 다녔지만 땡땡이 수영복에 땡땡이 수모를 맞춰 쓰고 온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고 했다.
그 후로 나의 수영복 쇼핑은 더욱 과감해졌다. 땡땡이 수영복 다음으로 산 수영복은 에디블이라는 브랜드의 마젠타 색 수영복이다. 그 수영복을 사고 남편에게 예쁘냐고 물었더니 예쁘다는 말 대신 이런 반응이 돌아왔다. “뭐, 케첩 같네."
케첩이라니. 걸어 다니는 케첩이 되고 싶진 않은데. 아니, 케첩이면 어때. 내가 입고 싶은 십은 수영복을 입고 매일 수영을 한 다는 게 중요하지. 마젠타색 수영복을 입고 갔더니, 땡땡이 수영복을 입을 때마다 눈이 아프다고 놀리던 수영 강사님도 케첩색 수영복이 이쁘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수영이 아니라 수영복으로 칭찬을 받다니. 뭐든 칭찬은 수영인을 열수 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행복한 고민을 한다. 내일은 무슨 수영복 입고 수영하러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