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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프로 Nov 17. 2020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눕니다]

한때 나에게 있어 '사랑'이란 단어는 곧 '열정'과 같은 의미였다.  


가슴 터질 듯 열망하는 사랑  
사랑 때문에 목숨 거는 사랑  

같이 있지 못하면 참을 수 없고  
보고 싶을 때 못 보면 눈멀고 마는  

활화산처럼 터져 오르는  
그런 사랑 그런 사랑~~   


이젠 까마득한 느낌이지만 이 노래의 가사가 정말 멋지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물론 현실은 '부부의 세계'야라고 믿는 편도 아니지만.. 그때는 열정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며, 사랑 없는 인생은 무가치하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술 한잔 하고 노래방에 가면 저 노래를 목 놓아 불렀던 기억이... ;-) 

 



'사랑'의 해석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랑'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아마도 이런 비슷한 종류가 아닐까? 요새는 사랑 때문에 목숨을 거는 신파류 영화나 소설도 뜸하고.. 썸을 타 보거나, 사귀기 전에 '삼'귀는 과정을 거치는 등 여러 모로 편리한 세상이지만 그래도 그 본질은 살아 있을 거라 믿는다. 


<사랑의 기술>은 그런 면에서 '진정한 사랑'에 대한 고찰과 충고를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 듯하다. 물론 이 책에 그런 효과가 전혀 없다 할 수는 없겠으나, 여기서의 '사랑'이 여전히 '리비도'에 기반한, 또 '남녀'간의 에로스적 사랑으로만 전제한다면 전체적인 내용에 대해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사랑’이라는 말 자체에서 오는 강력한 선입견이 크겠지만, 출판사도 한몫을 한다. (문예출판사에서 최근 나온 이 몽글몽글한 커버) 또 저자인 에리히 프롬의 기여도 없지는 않다. 실패한 사랑의 사례들 대부분을 부부 간, 또는 남녀 간의 관계로 담고 있으니.. 

또, 인터넷 서점의 책 소개를 보면.. 출판사에서 만들어 놓은 책 소개 마지막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이 말하는 것은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라, 이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과연 그럴까..? 이 책을 읽은 이의 연령이나 상황 등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겠지만.. '사랑'의 정의가 서로 모호한 상태에서 '사랑'을 멈추지 말라.. 는 것으로 요약하기엔 잘못 이해될 소지가 크다. 




'자본주의' 사랑이 문제다!   


프롬이 말하고자 하는 '사랑'이 뭘까? 어떤 문제의 의식이 있길래 굳이 '사랑의 기술'(카마수트라도 아니고..)까지 읽어야 하는 걸까? 그에 앞서, 대학 시절 읽은 김남주 시인의 시 한 편을 소개할까 한다.


(전략)

그리고 가실을 끝낸 들에서
사랑만이
인간의 사랑만이
사과 하나를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김남주 사랑 1 중


시를 쓸 당시 김남주 시인은 수감 생활 중이었다는데, 왜 거친 옥중에서 사랑 대한 시를 썼을까? 역설적으로 사회적, 개인적인 피폐함에 사과 한쪽 나눠 가질 줄 아는 '인간의 사랑'이 더 절실히 여겨졌을 듯싶다. 


프롬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랑'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주장한 '존재적 실존 양식'으로서의 태도로 보인다. 프롬은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사랑'마저도 '소유적 삶의 양식'으로 퇴보되고 있음을 비판한다.. (역시.. 이게 다 '자본주의' 때문이었다!!) 항상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프롬은 소유적 삶의 양식이 파국을 가져올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랑은 '소유적 실존 양식'에 불과하다. 우리는 살아 남기 위해 제대로 된 사랑을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사피엔스의 생존 지침서이며 노철학자의 절규다. 만백성에게 고하노니 사랑하며 살지어다.. 같은 한가(?)한 소리가 아니다. 




내가 느끼기에.. 프롬이 얘기한 '사랑'은 김남주 시인이 얘기한 '사랑'과 가장 유사해보인다. 나의 결론은 그렇지만, 이 책은 각자의 나이 또는 상황에 따라 '사랑'을 어떻게 전제하고 읽느냐에 따라 완전 다른 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한 권의 책으로는 역시나 부족함을 느낀다. '소유냐 존재냐'를 읽고 채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이 '사랑의 기술'을 읽고 보완되는 점이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프롬의 또 다른 책을 읽는다면 역시 마찬가지로 확장되어 나가는 세계관을 느낄 수 있겠지... 만! 


솔직히. 개인적으로 에리히 프롬과는 잘 맞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웬만해선.. 프롬의 책을 다시 읽고 리뷰를 올리는 일은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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