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아이의 내면에 줄 수 있는 어떤 확신
돌아보니 나는 어른 되기를 자꾸 유예하는 세상 철없는 엄마였던 거 같다. 그렇게 사는 게 아이가 어릴 때까지는 어찌어찌 통했던 것 같은데, 아이가 청소년기가 되자 그런 꼼수가 더는 유효하지 않았다. 이젠 문제를 외면하지 말고 믿을 수 있는 어른이 돼야 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갈등 상황을 자꾸 피해 가려고 하거나, 문제를 대충 임시로 봉합해 두고 넘어가려고 해도 안 된다. 가만히 있으면 뭔가가 저절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만 하는 시기가 됐다.
그런데 내 안에 남 탓하기 세포가 발동해서 모든 문제의 원인을 남편이나 아이에게 돌리고 싶은 욕망이 튀어 나왔고 너무 많은 실수를 했던 것 같다. 분명 처음 시작은 아주 사소한 일 때문이었는데, 작은 문제가 눈덩이처럼 커져서 아이에게 상처로 남을만한 너무 많은 말을 했던 거 같다. 어쩌자고 머리에서 떠오르는 것들을 그냥 말해버리거나, 화가 나서 할 생각도 없었던 독한 말들이 입에서 나왔을까. 진짜 사춘기 때는 아이를 존중하는 말만 골라서 해도 트러블 없이 잘 지낼 수 있었을 텐데. 그땐 왜 그렇게 작은 일에 목숨을 걸었나 모르겠다.
혼자 있으면 그동안 했던 모든 노력을 도루묵으로 만들었던 내 실수들에 너무나 화가 나서 일기를 쓰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에는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딸에게 편지를 썼다. 딸에게 미안하는 말,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는데, 막상 아이를 눈앞에서 보면 내 생각과 다른 말이 자꾸 튀어나와 버려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잠시 직장에서 시간이 날 때, 컴퓨터로 한글에 편지를 썼다. 주로 ‘엄마는 앵두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고, 네가 내 딸이어서 자랑스럽다’는 내용이었다. 어떤 편지를 쓸 때는 주책없이 눈물이 계속 나오기도 했다. 신기하게 자판으로 아이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을 구구절절 적어 내려가다 보니, 내가 아이를 많이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상한 시간이었다. 화나고 답답하고 지치고 힘들었던 시간까지 모두 어떤 ‘사랑’에 담겨있었던 거다.
평온한 마음에 쓴 편지에는 사랑이 담겨있었고, 말다툼을 하고 썼던 편지에는 분노가 담겨있었다. 사랑과 염려가 담긴 편지는 아이 책상에 올려뒀지만, 싸우고 화났을 때 써서 도저히 못 보낼 것 같은 편지는 과감히 찢어 버렸다.(물론 그런 편지를 다 버리진 않았고, 몇 번 보내봤다가 전혀 관계 개선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만 알게 됐다.)
그리고 어떤 편지가 됐던 뭔가를 쓰는 행위는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 답답한 마음을 글에다 토로하니 어느 정도 아이에 대한 원망이나 미움이 해소됐다. 화난 상태로 썼던 그 편지를 굳이 보내지만 않는다면 내 안의 분노는 이미 글 속에 넣고 증발시킬 수 있었고, 나는 다시 아이를 편견 없이 바라보며 새롭게 다가가 뭔가를 함께 해볼 수 있었다. 좋은 방법이었다.
돌아보니 어쩌면 딸과 나의 관계를 회복시켜준 건, 그때 보는지 안 보는지도 알 수 없이 보냈던 그 편지들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네가 어떤 사람이든 나를 너를 믿고, 있는 그대로 너를 사랑한다는 얘기는 한 사람을 붙들어 주는 엄청난 말이지만, 말로 전하기는 쉽지 않다. 당시에는 뭐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했던 편지쓰기가 아이에게 부모가 내면에 줄 수 있는 어떤 확신을 조금은 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게 관계 풀기의 실마리이자 이후 관계의 든든한 밧줄이 되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