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올 수 있는 나무와 집
사실 집단생활을 오랜 시간 해야 하는 청소년기 시절이 우리 모두에게 그렇게 즐겁기만 했던 건 아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나도 왠지 참 외로웠던 것 같다. 혼자가 되지 않으려고, 친구를 사귀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것 같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방황했던 것 같다. 교실에 늘 사람이 많았지만, 내가 어떤 사람과 잘 맞는지 알 수 없었고, 어떤 친구와 있을 때 진짜 기쁜지 구별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어쩌면 모두 그렇게 조금씩 외로웠을 텐데, 어떤 불안들을 쿨한 표정의 가면 속에 감추냐고 애를 썼던 것 같다.
최근에 ‘노멀피플’이란 소설을 보면서, 그 시간의 감각이 생생하게 다시 살아나는 걸 느꼈다. 무리 안에서 느끼는 아드레날린, 그리고 그 속에서 느끼는 불안감과 외로움, 진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연기하는 기분, 진짜 나로 누구와도 관계 맺을 수 없을듯한 두려움, 그리고 진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어 한없이 작아지던 마음.
학교에서 인기가 많은 소년 코넬은 학교에서 왕따로 살고있는 메리앤과 친밀한 사이가 되지만, 그 사실이 혹시 학교에 알려질까 봐 두렵기만하다. 그렇게 코넬은 계속 자신을 기만하다가 결국 메리앤이 상처받고 자퇴하는 것을 보게 되고, 소중한 우정과 사랑을 놓치게 된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후 알게 된 사실은 코넬이 그렇게 전전긍긍하며 숨기고 싶어 했던 메리앤과의 관계를 주변 친구들은 모두 그 시절에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는 거다. 그는 친구들에게 소문나면 학교생활이 끝장날 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던 그 비밀이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아무도 타인의 일에 크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만다. 실체도 없이 구름처럼 떠도는 명성과 인기에 대한 불안감이 모든 것을 가려버려 진짜 중요한 것들을 볼 수 없게 만든 거다.
어쩌면 사춘기아이들은 그맘때 진짜 평범한 사람이 되려고 간절히 노력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인기도 적당히 있고, 외모도 적당히 괜찮고, 공부도 적당히 잘하는 평균의 학생을 꿈꾼다. 아무도 자신을 이상하게 보지 않는 평범함을 찾기 위해 참 애쓰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 평범함 이라는 게 참 어렵다. 그 기준이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다. 분명 정상이 되고 싶은 것뿐인데, 그 기준에 들어가는게 왜 그렇게 힘든지 모르겠다. 왜냐고. 우린 모두 각자가 가진 특징과 고유성을 가진 인간이니까. 안간힘을 다해 평범한 학생처럼 보이려고 노력하고, 너무나 자연스러운 척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때의 ‘참 정상적인 나’는 ‘진짜 나’는 아닌 것 같다. 그저 정상이란 기준을 연기는 내가 있을 뿐이다. 모두 서투니 모두 조금씩 순수하게 잔인해지기도 한다. 그때는 뭐가 진짜 나인지 알 수가 없다.
세상은 요동치고 있고, 그 안에서 우리는 나를 내 모습 그대로 바라봐 주고 인정해줄 수 있는 한 사람이 필요하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불안한 시기, 내가 그래도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확신을 줄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하다. 그 단단함에 의지해 다른 누군가의 평가에 휘청거리지 않고, ‘나’를 잘 데리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갈 수 있다.
사춘기 아이들은 그 존재를 자신들 무리 안에서 찾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혹여 날 좋아하는 것 같은 친구를 만나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하다. 하지만 그 시기 아이들의 우정과 사랑은 때론 서로를 지켜줄 만큼 강하지 못하다. 어울리는 친구들이 나의 본질을 굳건히 지켜줄 만큼 성숙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때 곁에 있는 어른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서천석 박사는 한 강의에서 부모와 사춘기 아이의 관계를 나무와 새의 관계로 비유했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면 새는 가지에 앉지 않는다. 도망간다. 나무가 자리를 지키면 지친 새는 스스로 와서 앉는다. ‘어딜 돌아다니다 얄밉게 이제 와?’ 나무는 이렇게 따지지 않는다. 세상은 험한 곳이다. 부모만큼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아이들도 안다. 그러니 당장은 으르렁대도 언젠가는 돌아와 의지하게 된다.”
이 문장을 머리에 몇십 번을 되새기면서 잠 못 들던 밤이 있었다. 그리고 때로는 너무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나뭇가지를 마구 흔들던 때를 기억한다. 하지만 때로는 편지를 쓰고, 때로는 기도를 하며, 다시 그 나무가 되어야겠다고 계속 다짐했다. 아마 그 나무는 미안하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해서, 내가 나무로서 자격이 있을까 수백 번을 자책했을 거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씩 흘렀고, 그 나무는 이제 조금은 나무 노릇이 익숙해졌다. 어린 새가 아무리 가시 돋친 말을 해도, 세상이 끝날 것처럼 울어도, 가지를 흔들며 그 새를 보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아무 도움도 안 되는 말을 옆에서 하더라도 그냥 같이 버틴다.
최근 쇼미더미니에 나온 원슈타인이란 랩퍼의 'x'라는 곡을 듣다가, 마지막 구절 가사를 한참을 멍하게 들여다본 적이 있다.
“친구들 한번 엇나간 뒤로는 돌아올 수 없다고 느낀 적이 있다는 거 알아/ 화가 나 신발 끈을 묶고 집을 나서려던 내 뒤에서 할머니가 해주시던 말/ 너무 늦기 전에는 집에 돌아와야 해/ 저녁을 먹을 때는 집에 돌아와야 해”
누구나 상태가 엉망일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를 기다린다’고 말하는 사람의 한 마디가 얼마나 소중한지 떠올려 본다. 목이 메이는 그 사람 때문에, 나를 위해 울고 있는 그 사람 때문에, 우리는 다시 허리를 곧추세우고 나를 붙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