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썼던 편지를 다시 읽어보다
‘힘 빼기의 기술’이란 책에서 김하나 작가는 그녀가 살면서 가장 많이 읽은 책으로 ‘빅토리 노트’를 뽑았다. 그 책은 김 작가의 어머니가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5년 동안 볼펜으로 직접 쓴 육아일기다. 김 작가는 20살이 되던 해 받았던 그 노트를 침대 머리맡 가까이에 두고, 1년에 한 번 생일이 되면 탄생을 자축하며 꼭 꺼내 읽어 본다고 한다. 그 책은 친구들이 “참 안정되고 인생에 불만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는 김 작가 내면의 존재 자체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내 존재를 한 사람이 오랜 시간 지켜보고 보듬어주었던 작고 소소한 기록을 어른이 되어 다시 본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존재 자체가 흔들리는 순간마다 나조차 알지 못했던 기억들이 나를 보호하는 기분일까. 지금 이렇게 한심하고 초라해 보이기만 한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전부 걸 만큼 소중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안다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소박한 문장이, 단 한마디가 사람의 무언가를 바꿀 수도 있다는 걸, 난 아마도 본 것 같다.
노트북 폴더 정리를 하다가 우연히 내가 3년 전에 앵두에게 쓴 편지를 발견했다. 그 편지를 오랜만에 다시 읽어봤는데, 이상하게도 그때 느꼈던 감정이 다시 살아나면서 괜히 혼자 또 주책없이 눈물을 훔쳤다. 그 편지에 왠지 아이와 나의 결정적인 순간이 담긴 느낌이었다. ‘빅토리 노트’의 작가처럼 매일 5년간 육아일기를 쓰진 못했지만, 지금이라도 의미 있는 날이 되면 아이의 모든 삶들을 응원하는 편지를 쓰고, 지금 이 순간의 기쁨과 슬픔을 기록해 놔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진짜 어떤 마음은 그때 그 당시의 기록이 아니면 온전히 되살아나지 않는 것 같다.
사랑하는 나의 딸 앵두에게
앵두야, 요즘 힘든 일이 너무 많았지. 엄마도 너도.
요즘 부쩍 엄마는 앵두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 내가 정말 우리 딸한테 사랑을 더 많이 주지 못해서 그런 걸까. 표현을 못해서 그런 걸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후회가 밀려오더라.
엄마가 원래 감정 표현이 많이 서툴잖아. 그리고 가끔은 자존감이 약해서 화가 치밀 때 엄마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할 때가 있었던 거 같아. 엄마가 그동안 했던 무분별한 말들이 앵두한테 큰 상처가 됐다면 정말 미안해. 아마 그런 말을 했다면, 우리 딸이 절대 그렇게 살지 않을 거란 확신 때문에 극단적인 말이 튀어나온 것 같아. 너무너무 미안해...
엄마는 우리 딸이 어떤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라는 거,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거, 그리고 자신의 삶을 지킬 수 있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믿어. 그리고 엄마 아빠는 앵두가 어떤 상태에 있든 불안해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거기 그대로 서서 너의 든든한 방패막이 돼 줄 거야.
앵두도 그런 엄마를 믿어주고, 더 많은 이야기를 해줬으면 좋겠어. 하지 말라는 걸 했어도, 간혹 거짓말을 했어도…. 어떠니. 엄마나 아빠가 그런 걸 이해 못 하는 꽉 막힌 사람이 아니잖아. 뭘 하지 말라고 했던 건, 앵두에게 안전하게 놀 수 있는 울타리를 지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던 거 같아. 엄마는 내 딸이 누구보다 좋은 어른으로, 좋은 친구들과 삶을 사랑하고 즐기며, 어떤 사람보다 현명하게 잘 살게 될 거라 믿어.
앵두가 태어나 아기였을 때, 엄마 아빠는 너무 행복했어. 정말 앞으로 엄마 아빠 삶을 다 포기해도, 이 작은 아기를 위해서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았어. 그리고 그 마음이 지금껏 엄마 아빠가 쉬지 않고 일해올 수 있었던 이유였던 거 같아. 그리고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없어. 엄마는 앵두가 어떻게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아마 제대로 하루도 살지 못할 거야. 그래서 세월호 부모님들을 볼 때마다 우리 딸이 떠올라, 더 마음이 아팠던 것 같아.
사랑하는 우리 딸, 엄마는 지금도 하고 싶은 것들이 있고 꿈이 있어.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 딸과 재미있게 지내면서, 엄마가 쓰고 싶은 책을 내거나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하며 살 거야. 꼭 꿈이 유명한 사람이 되거나, 돈을 많이 버는 건 아니잖아. 내가 만족할 만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면 그게 꿈 아닐까.
앵두도 앞으로 뭐가 됐든 하고 싶은 걸 찾게 될 거야. 그리고, 비바람에 흔들리고, 눈물도 많이 흘리고, 아픔도 느끼면서, 조금씩 커나가게 될 거야. 게 같은 갑각류 생물은 성장할 때 허물을 벗고 껍질을 갈아입으며 성장한데. 그때 빈껍데기로 있으면서 제일 약한 시절을 보내는 거지. 그런데 그렇게 제일 약한 순간이 없으면, 성장을 할 수 없다고 하네.
내 딸에게도 아마 가장 약한 순간이 오겠지. 그리고 몹시 고통스러운 순간이 올 수도 있어. 그 순간에 엄마가 같이 울어주고, 이야기 들어줄게. 앵두야, 그 시간들을 우리 같이 잘 견뎌 나가자. 그리고 더 멋있는 껍질을 입자.
너무 많이 사랑한다. 내 딸...
2017년 12월의 어느 날 엄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