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생각한 것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드 Feb 04. 2023

내 자아만큼 소중한 타인


  꽤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앞으로 얘기하고 싶은 주제에 대해 아는 바도, 경험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이런 식으로 서문을 열어야겠다.


  나는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다. 각종 영화와 드라마, 음악, 소설이 예찬하고 숭배하는 에로스적인 사랑이 진정으로 궁극적이고 인정받을 만한 사랑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현실에서 대체로 그 외의 사랑이 가능한 건지, 존재할 수 있기는 한 것인지 가르쳐주지도 않기 때문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어처구니없는 망상 속에서 사랑을 겪어보지 못한 나를 그린다. 물론 세상에는 무엇무엇에 관한 아주 많은 사랑이 있다. 적어도 언어적 표현으로는 그런 것 같다. 나에 대한 사랑, 삶에 대한 사랑, 현재를 사랑하기. 사랑이 넘실대는 세상 속에서는 사랑을 모르는 나도 반사적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쓰게 된다. 


  내가 지금까지 경험해본 것들 중에서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동의할 수 있을 만한 것은, 아마도 엄마에 대한 마음이 아닐까 싶다. 나는 단지 엄마가 짐을 덜었으면 하는 마음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엄마 얘기를 하면 나는 언제 어디서든 울 수 있다. 엄마가 나를 떠나면 인생에서 가장 슬픈 순간이 찾아와 다시 병원에 다니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엄마가 좋아할 만한 뭔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늘 있다. 


  하지만 누군가를 아주 많이 좋아한다는 게 곧 사랑이라는 법칙과 정의는 없다. 내가 경험한 사랑과 가장 가까운 것은 에로스적이지도 않고 나와 나의 삶에 대한 것도 아니며 위대하고 희생적인 뉘앙스도 없다. 그렇다고 단어 사전에 의존하기엔 사랑의 사전적 의미는 현대에 와서 완전히 무용지물이 된 것 같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시대가 이야기하고 있는 사랑을 살펴보자니 그것들마저 다 '나'를 향하는 것 같다는 생각 말이다. 온갖 가수들은 연인과 헤어져서 슬픈 '나'의 감정을 노래한다. 내 주변에는 '나'라는 존재가 남이 보기에도 괜찮은지,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어 연애에 힘쓰는 사람이 있다. '나'의 구석구석을 사랑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내가 잘 살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정말 귀한 사랑은 그 역학의 방향이 바뀔 때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그 힘의 화살표를 몇 개라도 꺼내서 저편을 향하게 하는 일 말이다.


  만약 그런 전제를 가질 수 있다면 나는 약간은 사랑을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는 나에게 자신의 에너지와 시간을 쏟는 비용과 수고를 생각하게 만드는 존재가 있다. 보고 싶다는 말이 부담이 된다는 다수의 의견을 의식해 그런 말을 아끼게 하는 존재가 있다. 내가 굳이 나를 위해 맛보려 하지 않는 걸 선물해주고 싶은 사람, 언제나 무언가를 더 해주고 싶은 사람, 좋아서 신기하게도 조심스러워지는 사람이 있다. 내가 나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 위치에서 볼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 


  내 자아만큼 마음을 쓰게 되는 누군가가 있다.


  내가 너무 힘들 때도 그 사람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들 수 있고, 그의 아침과 밤과 주말이 평온하기를 바란다는 인사를 건넬 수 있다. 내가 야위어도 그 사람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불행할 때 그가 행복하다고 해서 질투가 나지 않는다. 어쩌면 내 자아보다 나에게 더 의미가 깊은 사람이 내 곁에 존재한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세상의 다수가 경험해본 것을 모르는 사람이라 이런 구구절절한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감사하는 모닝 페이지 5일 차 후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