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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질경이 May 20. 2023

태평양을 건너며 우리 할아버지를 생각했다

태평양횡단 크루즈 


 평소처럼 아침 6시에 일어났다. 그런데 밤 사이 한 시간을 뒤로 돌려야 하는 날이라 배의 시간으로는 5시다.

아직 식당도 문을 열지 않아 커피도 신문도 없다.

일어나 서성 거리다 데크를 돌았다.

어느 순간 무지개가 나타났다. 



아침을 먹으러 9층 식당에 가니 빈자리가 없다.

스위스에서 왔다는 세 사람과 합석을 했다.

나이 든 여자와 중년의 남녀다. 가족 같지는 않고 좀 이상한 조합이었다.

나이 든 여인이 말했다. 자기는 아이를 낳아 본 적이 없고 그래서 걱정도 없고 행복하다고.

나 혼자 속으로 말했다.

아이를 낳아 키워 본 적이 없어 무엇을 놓쳤는지 모르실 거라고... 

오전에는 배의 항로 장치에 관한 강연이 있었다. 태평양은 지구 전체의 3분의 일이라고 한다. 몇 날 며칠을 가도 아무것도 안 보일 때가 대부분이다.

지도를 보니 절반을 더 왔다. 

이 배가 어디 있는지 정확하게 알려주는 장치다.   

날씨도 과학적으로 미리 예보해 준다.

동남쪽에서 미풍이 불고 

약간 구름이 끼었다. 

내가 탄 배가 잘 가고 있고 날씨도 좋다 하니 마음 놓고 점심을 즐기자.. 이날 점심은 해산물이다.



오후에 베란다로 들어오는 햇살이 뜨겁다.

맞아.. 방금 적도를 지났지..

이날 해는 이렇게 졌다. 바다만 바라다본 날은 생각이 많아진다.


 이 여행을 하며 100여 년 전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신 우리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내가 어렸을 때 들었던 할머니와 다른 가족들의 이야기를 요약해 보면,

일제 강점기 때 부산에서 항일 운동으로 청년들과 전차를 넘어트리고 수배가 되자 할아버지는 사탕수수 농장으로 일하러 가는 사람들과 미국행 배를 탔다고 한다.  새로운 문물에 호기심이 많았던 할아버지는 일본에 도착해서는 상투를 자르고 하이칼라 헤어스타일로 변신했다. 그런데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 불감회상이 효지시야라”하던 시절이라 자른 상투를 차마 버리지 못해 나무 상자에 담아 고이 싸서 고향 집으로 부치고 하와이행 배에 올랐다. 고향집에서 잘린 상투를 소포로 받은 부모님들은 아들이 죽은 줄 알고 상투를 놓고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하와이에 도착한 할아버지는 일은 하지 않고 사탕수수농장에서 일을 해 고향에 돈을 부치려는 사람들의 돈을 빌려 잘 쓰고 지내다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미국 본토까지 구경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 또 한 번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증조할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사탕수수 농장 이민자에서 빌린 돈을 다 갚아주고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셔서 집안에서는 화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82년 아버지가 미국에 오셨을 때 파파야라는 과일을 좀 사 오라고 하셨다. 할아버지께서 미국 가셨을 때 파파야라는 과일을 먹었는데 무척 맛이 좋았다고 했던 말이 생각나 한번 드셔 보고 싶다는 거였다. 사다 드렸더니 상상했던 만큼 맛이 있지는 않다고 하셨다.

옛날에 할아버지가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에서 찍은 누런 사진이 집에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른다.

시대를 앞서 가셨던 우리 할아버지가 살아계신다면 참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내가  11개월 때 돌아가셨다.  


 이번에 태평양을 배로 건너며 할아버지를 생각한다.

혹시 우리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어린 아기였던 나에게

“얘야, 세상은 넓고, 보고 먹을 것은 많이 있단다.”라고 말해 주신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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