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다, 말리다
7, 8월을 지나는 동안 텃밭은 전쟁이다. 제일 무서운 대상은 풀이지만 작물도 만만치 않다.
풀은 풀이어서 힘이 세다. 자라는 속도로 밭을 장악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풀보다 힘이 약한 인간은 따라다니며, 땀을 뻘뻘 흘리며 베고 뽑아도 늘 뒤진다. 하지만 끝까지 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풀이 밭을 점령할 것이고, 텃밭은 한 발도 들여놓을 수 없는 빼앗긴 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풀은 풀이어서 그렇다 하더라도 작물도 무섭긴 매한가지이다. 호박의 경우, 잠시만 방심하면 줄기식물인데다가 특유의 커다란 잎으로 금세 밭을 덮어버려 다른 작물이 자라지 못하게 만든다. 가지는 마디마다 새순이 돋아서 제때 잘라주지 않으면 곁가지가 마구 번져 튼실한 가지 열매로 자라지 않는다. 적당히 남기고 남은 잎은 잘라주고 곁가지도 날 때마다 잘라 내야, 햇빛과 공기가 잘 통하고 가지 열매로 영양이 오롯이 가게 된다. 이런 이치는 고추, 오이, 토마토, 참외 같은 열매를 먹는 작물 모두가 같다. 땀 흘리며 열심히 작업해서인지 올해는 가지, 오이가 튼실하고 많이 달렸다.
채소를 자급자족하기 위해서는 제철이 아닌 계절에도 먹을 수 있도록 보관하고 저장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가지같이 수분이 많은 작물은 말리는 방법으로 오래 보관할 수 있다. 고추 역시 고춧가루를 만들어 두고 일 년 내내 먹어야 하므로 말려야 한다.
장맛비가 참 지겹게도 내리더니 며칠 전부터는 계속 날씨가 맑고 햇볕이 강하다. 뜨거운 햇볕은 작물을 말릴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된다. 장마 기간처럼 비가 올 때는 건조기에 넣어 말리기도 하지만 햇빛에 말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베란다 밖에 통통하고 길게 자란 가지와 빨간 고추를 내어 말린다. 가지는 말릴수록 속 부분의 습기가 말라 진한 보라색의 겉만 남게 되고, 고추는 속이 다 비칠 만큼 투명해진다. 뜨거운 햇볕을 온몸에 맞으면서 말라가는 채소를 보고 있자니 ‘마르는’ 것은 속을 드러내는 일이라는 것을 알겠다. 마르고 말라서 자신이 가진 수분이 모두 공기 속으로 사라지고 나면, 투명하게 속이 드러나고 거죽만 남아 자신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한다.
어느 시인이 ‘슬픔을 말리라’고 했던가. 뜨거운 햇볕을 온몸에 맞으면서 말라가는 채소를 보며 생각한다. 나도 채소라면, 버리고 싶지만 버리지 못하고 있던 것들을 ‘말려서’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 그러면 온전히 ‘나’와 마주할 수 있을까?
여름의 끝 즈음, ‘말려서’ ‘말라서’ 더 오래 존재할 수 있음에 대해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