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띠까"
이 말은 내가 돌보았던 자폐 유아 중 한 명인 주희가 자주 하던 말이었다.
주희는 들었던 말을 기억했다가 상황에 얼추 맞게 말해 내는 '지연 반향어'를 자주 했다.
예를 들면 배가 고플 때 "맘마 줄까?"라고 하며 식사를 차려주던 부모님을 떠올려서 "맘마 줄까?"라고 말했다. 그러면 어른들은 '주희가 배고프구나'하고 알아듣는 것이다.
주희가 어린이집에 처음 온 날, 주희는 내내 울었다. 내가 현장에서 만난 자폐 유아들은 대체로 부모님과 떨어지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았는데 그 아이는 예외였다. 교사들은 주희가 교실에 적응할 수 있게 이 장난감, 저 장난감 내밀어보며 달래려고 노력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 주희는 한참을 울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교사에게 말을 걸었다.
"부띠까"
주희가 교사들에게 건넨 첫마디였건만 불행히도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응? 뭐라구? 부띠까? 부띠까가 뭘까... 피카츄 말하는건가"
교사들이 원하는 반응을 해주지 않자 주희는 자지러지게 울며 반복해서 외쳤다.
"부띠까!! 부띠까!!! 으아앙!! 부띠까!!"
주희가 반복하던 말이 "붙일까?" 였다는 것을 이해한 건 며칠 후였다. 그리고 그 말의 뜻이 '나를 달래주세요'라는 것을 이해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이 더 지난 후였다.
주희의 부모님은 아이가 울 때마다 함께 슬픈 표정을 짓고 공감해주며 아이를 달래다가 마지막엔 캐릭터 반창고를 꺼내며 "마음이 많이 아팠지? 반창고 붙일까?", "이제 다 나을 거야, 괜찮아"하고 안아주었다. 이렇게 하면 주희는 곧바로 안정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나는 주희가 울 때마다 놀랍도록 빨리 그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캐릭터 반창고를 가져와 "붙일까?"라고 묻는 것 만으로도 주희는 울음을 그쳤다. 반창고가 다 떨어지면 스카치테이프를 붙이는 것도 충분히 효과적이었다. 주희가 슬플 때 그 마음을 달래주는 것은 사실은 반창고가 아니라 '공감과 이해, 그리고 애정'이었으니까.
아이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소통하기도 한다. 아이들이 하는 엉뚱한 말을 듣고 당황하기만 하면 아이와 소통할 수 없다. 아이의 말이 지닌 정확한 속뜻을 알기 위해서는 아이를 들여다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