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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땜미 Oct 11. 2022

태어나는 건 피곤한 일이야

사노 요코 '태어난 아이' (2016, 거북이북스)

이 그림책은 태어나고 싶지 않아서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이야기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태어나지 않았기에 볼 수 있는 풍경들 속을 돌아다닌다. 우주 한 가운데에서 별 사이를 걸어 다니기도 하고, 태양 가까이에 다가가 보기도 한다. 태어나지 않았으니 할 수 있는 일들이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사자에게 물려도보고, 강물 위를 걸어서 건너보기도 한다. 우리에겐 놀라운 일들이지만, 이 아이는 전혀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태어나지 않았으니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어느 날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공원에 앉아 아무 상관이 없는 것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한 여자아이가 그 곁으로 다가왔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항상 그랬듯 여자아이에게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았다. 여자아이가 공원에서 우연히 강아지에게 물리고, 여자아이의 엄마가 달려와 달래주는 모습을 보고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조금 흥미를 보이기 시작한다. 엄마는 여자아이를 깨끗이 씻기고, 약을 바른 다음 물린 곳에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태어나지 않은 아이도 반창고가 붙이고 싶어졌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반창고, 반창고!"하고 외쳤고, 마침내 태어났다.
태어난 아이가 다쳤을 때 이전과는 다르게 아픔을 느끼고 울기도 했다. 그때 여자아이의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태어난 아이의 엄마가 달려와서 달래주고, 씻겨주고, 약을 바른 다음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태어난 아이는 공원에서 마주친 여자아이를 보고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내 반창고가 더 크다!"

태어난 아이가 밤에 침대에 누워 엄마에게 말한다. "이제 잘래. 태어나는 건 피곤한 일이야". 엄마는 태어난 아이를 꼭 껴안고 잘 자라고 입 맞추었고, 태어난 아이는 푹 잠들었다.

아마 태어난 아이는 다음날 다시 일어나 하루를 보내고, 피곤해하며 잠이 들고, 그럼에도 다음날 다시 일어나 하루를 보내겠지.

이 책을 읽고 주희가 생각났다. 아픈 곳이 없는데도 반창고를 붙여달라며 걸핏하면 손가락을 내밀던 아이. 주희는 반창고를 '오리'라고 불렀다. 처음엔 주희가 말하는 '오리'(또는 부띠까)가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해 애를 먹기도 했다. 그러나 주희의 가족들은 한 번에 알아듣고 매번 오리 캐릭터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가족들이 주희를 사랑하는 방식이 겉으로 드러난 매개체 중 하나가 오리 반창고였던 것 같다. 아마도 주희가 손가락을 내밀 때마다 사랑을 가득 담아 오리 반창고를 붙여주었겠지
주희가 나에게 '오리'를 원할 때마다 다친 곳이 없는데 자꾸 반창고를 붙여달라해서 곤혹스러웠는데 뒤늦게 생각해보니 그 아이가 원했던 것은 사실 '사랑과 관심'이었을 것이다.
(주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https://brunch.co.kr/@ttam/3 '부띠까' 참조)


한 가지 고백하자면, 2년간 주희의 담임을 맡으며 첫 1년은 주희를 온전히 사랑하기 힘들었다. 주희는 산책하다가 강아지가 지나가면 강아지를 때리고, 박물관에 견학하러 가면 박물관 유리벽을 발로 차는 아이였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주희는 강아지에게 물린 적이 있어 강아지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는 거였다. 박물관에서는 주희가 이해할 수 있는 유물들이나 전시품이 없어 유리벽에 흥미를 보인 것뿐이었다.

아이들은 언제나 문제행동을 일으켜요, 왜? 살아있으니까 일으키는 거야. 죽어봐, 일으키나


송은이와 김숙의 비밀보장에서 오은영 선생님이 말씀하신 위 문장은 영유아들이 문제행동을 할 때마다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게 해준다.


주희가 일으키는 문제 행동들이 오은영 박사님의 말을 인용하면 모두 살아있기 때문에 일으키는 것들이었다. 실은 문제행동을 일으키는 아이들에겐 모두 이유가 있다. 문제행동의 이유를 제대로 알고 해결하는 방식을 분명 아는데도, 나는 너무 쉽게 '아유, 얘가 왜 이래'라는 말로 아이를 '이상한 아이' 취급하진 않았던가 돌아보게 된다.

한때는 '원하지도 않았는데 왜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 이런 모진 세상을 살게 하나요?' 속으로 외치며 남몰래 부모님을 원망했던 적이 있었고, 어떤 때는 '태어나길 잘했다.' 생각할 때도 있었다. '태어난 아이'를 읽으니 한 번도 든 적이 없던 생각이 든다. 어쩌면 모든 사람은 태어나기를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에 미치니 이왕 태어나기를 선택하고 태어난 것. 내 선택이 맞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진다. 매일 '태어나길 잘했다, 살아있어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며 잠이 들 수 있길.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 또한 '태어나길 잘했다.'라고 생각할 수 있게 세상을 바꿔나갈 것이다. 아동 혐오와 아동학대, 가정폭력이 여전히 일어나는 이런 세상은 그만. 모든 아이들이 매일 밤 푹 잠들고, 다음날 일어나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세상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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