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 대신 마음을 건넸던 어느 오후의 기록

스크립트 너머의 사람

by 잎새

고객센터 상담사라는 직업은 익숙한 스크립트 속에 산다.
배포된 수많은 지침 속에서, 적절한 문장을 골라 전달하는 일.
정답은 정해져 있고, 실수는 도태로 이어진다.

3개월에 한 번, 업무평가시험이 다가오면
예상문제집 100여 개를 외우듯 달달달 외워야 했다.
100점을 받지 못하면 ‘문제 직원’이라는 낙인이 붙는다.
그렇게 평가받고,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듣는다.

요즘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이런 일은 나보다 AI가 더 잘할지도 모르겠다.”

정보를 정확하게 분류하고, 정답을 빠르게 도출해내는 일.
그건 어쩌면 인공지능, 챗GPT가 더 잘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내 자리가 위협적으로 느껴졌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때로는 누군가의 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그냥 듣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에게는 ‘괜찮아요’라는 위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익숙해진 일과.
습관처럼 흘러가던 하루의 나른한 오후,
그날도 평소처럼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상담사 ○○○입니다."

익숙하게 인사하고, 본인확인을 마치자
전화기 너머의 상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단 한마디를 뱉었다.

"도와주세요."

그 순간, 스크립트는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규정, 매뉴얼, 처리 범위… 그 어떤 것도 이 목소리 앞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그녀는 자영업자였다.
유명 의류 브랜드의 매장을 운영하며, 본사의 지시에 따라
보증보험서를 제출했고, 그 서류를 담보로 대출이 실행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그 대출금으로 본인이 월급을 받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정산이라 믿고 받은 돈이, 알고 보니 채무였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브랜드는 모든 점주들을 속인 채
회사를 파산시켰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수천만 원의 빚을 떠안게 되었고,
상환이 진행되지 않자, 연체 관련 문자와 추심 연락이 쏟아졌다.
처음엔 스팸이겠거니, 보이스피싱이겠거니 했던 그 메시지들이
현실로, 공포로, 그녀의 일상 속으로 밀려들었다.


그 사실조차 추심원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몰랐다.
수많은 문자나 전화는 스팸이거나, 보이스피싱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고,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그저 "도와주세요"라는 한마디밖에는 할 수 없었다.

상담사의 업무 범위를 명확히 정해놓은 매뉴얼대로라면
그 순간, 나는 안내만 하고 통화를 종료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잠시만요. 확인 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나는 헤드셋을 벗고, 책상을 떠났다.
5층, 6층을 뛰어다니며 해당 사례를 도와줄 방법을 찾아 헤맸다.
상부 부서에 끊임없이 보고하고, 가능한 창구를 알아보았다.
다른 콜을 모두 포기한 채,
그녀의 문제 하나에만 두 시간 넘게 매달렸다.

상담사가 콜 수를 포기한다는 건, 곧 수당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날 나는, 돈보다도
그녀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일을 선택했다.

결국, 사례는 상부로 이관되었고
나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담당 부서에서 곧 연락드릴 예정입니다.”

그녀는 알았을까.
익명 속의 상담사가, 자신의 절박한 한마디를 듣고
책상 밖을, 스크립트 너머를 향해 달렸다는 것을.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어요."

메뉴얼대로라면 '친절하시네요'라는 평가 한 줄이
나의 업무 성과에는 더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쩐지, 그날은 달랐다.

그녀의 한마디에는 진심이 묻어 있었다.
누군가가 건넨 인정과 감사의 마음이,
내가 단순한 '상담사'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사람에게 손을 내민 존재라는 걸 느끼게 했다.

그 말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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