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포주공 1단지 재건축 이야기 총정리
아버지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5살 무렵의 어느 날 6시 40분쯤. "100까지 세면 아빠 오신다"는 엄마의 말에 하나, 둘, 셋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그리고 "100" 하는 순간 벨이 울렸다.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월요일에 엄마가 지갑에 만원을 넣어놓으면 금요일까지 10원도 쓰지 않았다. 버스 타면 10분이면 가는 회사를 돈이 아깝다며 30분씩 걸어다녔다.
퇴근 후 9시 뉴스가 끝나면 방에 들어가 딱 한시간 공부를 하고 나와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제1회 공인중개사에 합격했다.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주말이면 주중에 쓰지 않은 돈 만원을 들고 부동산을 보러 다녔다. 유일한 취미였다고 했다. 아버지를 잘 아는 회사 동료들은 주말마다 따라다니기도 했다.
내가 태어난 이듬해 아버지는 아파트를 샀다. 경기도 회사 근처가 아니라 강남이었다. 당시 살던 지역 아파트보다 3배나 높은 가격에 모두 말렸다고 했다. 그때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30년만 갖고 있자. 이건 아들내미 장가 밑천이다."
아버지가 처음 집을 사려고 했던 지역은 잠실이었다. 당시 잠실 아파트는 강남보다 훨씬 비쌌다. 그래서 집장사를 하던 외할아버지를 찾아가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차선책으로 고른 곳이 개포주공 1단지였다.
아파트 한 채에 만족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그 집을 할머니 명의로 매입했다. 언젠가 있을 다음 투자를 위한 포석이었다. 하지만 대기업이라 해도 당시 월급은 네 가족이 먹고살기 빠듯했고, 보너스와 상여금은 모두 은행이 가져갔다.
7살 무렵 아빠는 몸이 안 좋다며 병원에 입원했다. 작은 수술을 받았으나 병명을 잡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여러 병원을 돌다 뇌종양 수술까지 받았다. 장발이 멋진 아버지는 더 이상 머리를 기르지 못했다. 그리고 2년 뒤 세상을 떠났다.
엄마는 두 번의 수술을 견딘 아버지에게 "집을 팔아 수술을 더 받자"고 했다. 아버지는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엄마에게 돌아가시기 전까지 끊임없이 강조했다고 한다.
"그 집은 절대 팔지 마라. 30년은 갖고 있어야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공공기관에 취업했다. 여자로서 다른 직업보다 지위도 높고 업무강도도 높지 않았지만, 급여가 적었다. 은행은 이자를 계속 빼앗아갔고, 세 가족은 계속 먹고살기 빠듯했다. 그래도 집은 팔지 않았다.
우리 가족이 외식하는 날은 내가 반장이 되거나, 시험결과 1등을 하거나, 학교 밖에서 상을 타오는 때로 한정됐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필사적으로 반장을 하려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0여 년쯤 지났을까. 집을 팔라는 전화가 득달같이 왔다. 개포동에 있는 부동산 모두가 우리집에 전화하는 것 같았다. 모두들 한결같이 '개도 포기한 개포동인데 지금이 가장 잘 받을 수 있는 가격'이라고 했다.
들려온 이야기로는 아버지를 따라 같은 아파트를 매수한 분들 대다수가 이때 팔았다고 한다. 10년 동안 오르지도 않고, 세도 별 시덥지 않았던 만큼 후련해했다고 들었다. 그러면서 우리 집도 그거 틀켜쥐고 있어 봐야 좋은 날 오지 않는다며 팔고 신축을 사서 옮기라고 했다. 왜 그렇게 사냐며…
그래도 집을 팔지 않았다. 오히려 할아버지는 우리 집을 찾아와 지금이 명의변경을 할 마지막 기회라고 하셨다. 덕분에 아파트는 그제야 제 주인을 찾았다.
명의를 변경한 직후 재건축 조합이 설립됐다는 이야기가 등장하면서 아파트는 평당 3000만 원을 돌파했다. 1년 뒤에는 3500만 원이라고 했다. 1년 뒤에는 4000만 원이라고 했다. 2007년 기사를 찾아보니 17평이 최근 1억 하락했는데 그게 7억이라고 적혀 있다.
개포동 재건축 예정단지는 정부의 대책이 나오면 1년 정도 뒤에 수그러들었다가 풀리면 가격이 껑충 뛰는 흐름이 반복됐다. 물론 신경 쓰지 않았다. 세입자는 바뀌어도 월세는 10년 넘게 동일했다. 서울 외곽 원룸 가격이었다. 신혼부부, 사회초년생, 할머니 할아버지가 거쳐갔다.
내가 처음 그 아파트를 찾아간 것은 대학도 졸업하고, 군대도 다녀오고, 사회생활도 어느 정도 한 뒤인 2010년대 초반이었다. 버스를 타고 한강을 가로질러 직진만 하는 길이 어색했다. 직장도 자취하는 곳도 강북인 사람에게 강남은 완전히 다른 세상처럼 보였다.
버스에서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타워팰리스와 한눈에 보기에도 있어 보이는 동네들을 지나 개포동으로 들어오니 아까와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어떻게 여기에 사람이 사나 싶었다.
"그래도 200만 원 들여 싱크대와 벽지는 갈았다"는 공인중개사의 말에 충격을 받고, 집 보러 가는 길에 "주차 어디에 했냐"는 말에 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집을 둘러보고 온 뒤 세입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런 집을 임대해 드리게 돼서 죄송합니다."
강남에 이런 집 구하기 힘들다며 감사하다던 내 또래 예비새댁은 잔금일 전 작은 짐을 옮겨놓겠다고 한 뒤, 파혼했다. 그리고 일주일이나 보증금 잔금을 내지 않다가 죄송하다고 문자만 남겨놓은 뒤 나갔다.
이런저런 세입자와 울고 웃다 보니 여러 부동산에 전화번호가 퍼졌나 보다. 2016년 대치동 부동산에서 온 전화를 듣다가 몸이 굳어버렸다. 이 집이 10억이 넘었다…
2003년 조합설립 이후 하네 마네, 주네 마네, 가네 마네, 파네 마네 하던 재건축 이야기가 궤도에 올랐다고 했다. 분양가 상한제를 피하기 위해 빨리빨리 해야 한단다. 주제당 저마다 한 마디씩 5000마디를 내놓던 사람들이 갑자기 일치단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8년 관리처분인가를 받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이주 및 철거도 일부 세대와 상가를 제외하고는 슥슥 순식간에 처리됐다. 불행히 우리 세입자는 일부 세대에 속했다. 철거를 지연하는 단체에서는 세입자 할아버지에게 버티면 이주비 2000만 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단다. 부동산 계약서 상 특약사항으로 '이주 시 비용 지불하지 않는다'는 점이 있었음에도 할아버지는 버티겠다고 했다.
경매나 공매 명도처럼 개인 대 개인의 법적다툼을 생각했던 것 같다. 경매에서 시간은 낙찰자에 유리하다. 하지만 재건축에서는 집주인이 불리하다. 몇 번 경고 후 조합은 강제집행을 예고했다. 그리고 강제집행 당일 할아버지는 자진해 이사했다. 1년여간 내지 않은 월세와 강제집행 비용까지 제외하고 나니 돌려줄 보증금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몰려드는 부동산의 전화와 문자메시지…이 집은 이제 20억을 넘어섰다.
철거가 완료되고 40여 년 만에 빛을 본 거대한 흙더미 위에 세워진 가건물에서 엄마와 동생은 우리 집이 될 신세계를 미리 보고 감격해했다.
부동산으로 돈을 번 이들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투기꾼이라고 한다. 1~2년 급상승 시기를 잘 타서 사고팔고, 분양받아 프리미엄을 받고 넘기고 해서 순식간에 재산을 불린 이들에게는 그게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 재산의 80%가 부동산에 몰려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누구나 꿈이 내집마련인 세상 아닌가. 집이 전 재산인 사람들에게 집값은 삶의 전부다. 경제상황과 정책변화가 어떻든, 갑자기 폭락했다고 한들, 괜찮은 집은 계속 오른다. 지금까지 그래왔다.
아버지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이를 넘기면서 뼈저리게 깨닫는다.
아버지가 아직까지 살아계셨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얼마나 투자에 성공했을까. 그럼 나는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며 살 수 있었을까… 생각할수록, 나와 비교할수록 무섭다.
부동산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일확천금을 가져다주는 로또가 아니다. 더 늦지 않게 공부하고, 판단하고, 비교하고, 앞서 성공한 사람을 벤치마킹해야 한다. 공부를 하다 보면 분명히 그날이 온다. 이곳이 좋은지 안 좋은지 대번에 보이는 그날이 분명히 온다.
내 아버지가 38년 전 개포주공 1단지를 디에이치퍼스티어아이파크로 봤던 것처럼.
한편으로 정리한 개포동 우리집 이야기는
재테크 커뮤니티 '행복재테크'에도 공유합니다.